기업나라
202009.21
역사 속 비밀공간의 반가운 환대
문화비축기지

말로만 들어서는 ‘원래 거기에 뭐가 있었던가’ 싶다.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바로 옆이라는데, 대부분은 무심코 지나쳤을 만한 장소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보안시설로서 무려 41년 동안 일반인에게 꽁꽁 숨겨져왔던 비밀공간이다. 이름하여 석유비축기지, 그러다 말끔하게 문화의 옷을 갈아입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지가 이제 3개월 남짓이다. 석유 대신 문화로 다시 채워진, 마포 문화비축기지로 간다.

석유에서 문화로, 시민이 다시 채우는 역사
매봉산과 맞닿은 곳에 산만큼 거대한 탱크들이 띄엄띄엄 놓여 있다. 비밀스럽게 지하에 매립되어 있어 예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 도시재생사업으로 다시금 존재를 드러낸 것. 이곳은 원래 1973년 석유파동 이후 석유 공급이 끊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목적으로 비상용 석유를 비축하던 시설이다. 총 5개의 탱크에 서울 시민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는 6,907만ℓ의 석유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2002년의 월드컵을 앞둔 2000년 안전상의 이유로 폐쇄된 이후 지난 9월에 ‘문화비축기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공개됐다.
이름 그대로 이곳은 전시와 공연, 강연회, 대담 같은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상당부분은 공간의 쓰임새를 한정짓지 않고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보고, 즐기고, 배울 콘텐츠가 유난히 풍성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넓은 광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울퉁불퉁한 바닥이 그대로 드러난 공간 뒤로는 탱크들이 산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세월이 여실한 흔적 위에서의 조화가 이색적이다. 문화마당이라 불리는 이곳은 오랫동안 임시주차장으로 사용되다 시장, 축제, 공연 등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달시장’이 열리기도 한다.
매달 둘째 주 토요일, 달이 뜰 즈음에 문을 여는 달시장은 마포구에 터를 잡은 문화예술가와 청년창업가 그리고 시민이 함께 어우러지는 살거리, 볼거리, 먹을거리 가득한 마을 시장으로, 올해의 마지막 달시장은 12월 9일 오후 5시부터 예정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달시장에서는 일회용기 사용을 지양한다는 것. 그릇대여소에서 보증금 1,000원을 내고 그릇을 대여해 사용한 후 반납하면 보증금을 돌려받는 방식이다. 과정이 조금 번거로울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환경을 지키는 캠페인에 동참할 수 있어 뜻깊다.
문화비축기지는 워낙 공간이 넓어서 꼭 어디부터 가야 한다고 정하기는 어렵다. 문화마당을 중심으로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난 길을 오른 후 마음 내키는 대로 둘러보면 된다. 과거의 석유비축기지가 오늘의 문화비축기지로 바뀐 과정과 현재의 이야기를 먼저 만나보고 싶다면 오른쪽 동선이 적합하다. 이야기관인 T5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단 외관부터가 압도적이다. 날것 그대로 드러난 암반 지형이며 낡은 콘크리트 옹벽, 녹슨 철판이 이름 그대로 오랜 이야기를 건네는 듯하다.
전시실 입구로 들어가 탱크를 한 바퀴 돌면 1970년대 석유비축기지 시절부터 현재까지 쌓인 역사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장소성과 관계성에 관한 이야기부터 당시 석유비축기지에 근무했던 사람들의 추억담, 문화비축기지 조성 과정과 의미 등이 시간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또 한 가지, T5 전시실에서 관람 방향으로 걷다보면 매봉산의 절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난 포토존도 있어 중간중간 쉬어가기 좋다.

겉으로 봐서는 내부가 전혀 예측되지 않는 T1. 긴 입구를 통과하면 투명한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전시장이 나타난다.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탱크들
바로 옆의 T4는 복합문화공간이다. 15m 높이의 기존 탱크 공간을 그대로 살려 전시와 퍼포먼스, 워크숍 등을 다양하게 진행하는데, 위에서부터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구조와 내부의 독특한 형태 덕분에 이색적인 분위기가 극대화된다.
T4에서는 내부 말고 외부도 특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곳의 다섯 탱크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류계측기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시계처럼 보이는 유류계측기는 탱크 안의 석유 양을 재는 용도로 사용됐는데, 석유가 유실 없이 잘 보관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은 당시 이곳 근무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고 한다. 시멘트 외벽의 미세한 틈으로 뿌리를 내린 오동나무도 독특하다. 석유비축기지가 운영 중이었다면 안전상의 이유로 뽑혔을 테지만, 폐쇄 이후 뿌리를 내려 지금은 키가 훌쩍 자랐다.
T3는 유일하게 석유비축기지 시절의 유류 저장탱크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미래의 쓰임새를 위해 현재모습 그대로 둘 뿐 어떠한 인공적인 변화도 시도하지 않고, 깎아놓은 암반들이 풍화되어 가듯 콘크리트와 탱크 구조물들도 세월에 자연스럽게 깎이도록 한 것. 때문에 내부는 출입이 제한되는데, 입구까지는 들어가 내부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열려 있다. 땅속으로 묻힌 탱크까지는 좁은 철제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탱크를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깊이 파 앉혔기 때문에 바닥까지의 깊이가 상당하다.
T3와 조금 떨어진 길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구조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류 저장탱크의 경우 방호용 옹벽 구조물을 조성한 후 내부에 강판 소재의 탱크를 매설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아래쪽을 흙으로 채워 외부에서는 식별이 어렵도록 했다.
길은 다시 탱크의 철재를 모두 제거해 만든 공연장 T2로 연결된다. 입구부터 시작되는 경사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탱크 상부는 탁 트인 야외무대로, 그 아래는 실내 공연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야외무대의 경우 공연이 없을 때는 휴게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곳 역시 과거의 흔적은 여실하다. 탱크를 감싸고 있던 옹벽 일부가 무대 뒷벽 역할을 하고 있고, 탱크 해체 후에 남은 두꺼운 철판은 야외무대 주변에 둘러쳐 놓았는데, 깔끔하게 정돈된 공연장과 바로 뒤에 병풍처럼 우거진 숲 사이에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유리벽 너머로 매봉산의 암반과 그 틈에 자라난 식물들을 볼 수 있는 T1의 다목적 공간.

T2 야외무대. 탱크를 감싸고 있던 옹벽 일부가 무대 뒷벽 역할을 하고, 그 너머로는 탁 트인 하늘이 보인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T3 탱크 원형. 문화비축기지 내 5개의 탱크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재활용의 가치를 다시 쓴 복합문화공간
커뮤니티센터인 T6는 외관 색이 독특해 가장 눈에 띈다. 1번과 2번 탱크에서 해체된 철판을 재활용해 새롭게 지은 터라 세월의 흐름만큼 녹슬고 빛바랜 흔적이 무늬처럼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또한 매력으로, 그 어떤 예술가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공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사실 문화비축기지는 T6의 재활용 콘셉트에서도 볼 수 있듯, ‘친환경’이라는 키워드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녹색건축인증 우수등급과 에너지효율등급 최우수등급으로 예비 인증을 받은 것. 산업화시대 유산인 탱크들은 물론 내외장재, 옹벽 등 하나부터 열까지 기존 자원들을 재생하는 방식을 적용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의 냉·난방은 지열을 활용한 신재생에너지로 이루어지며, 조경용수와 화장실에서 사용되는 물 또한 각각 빗물 저류조와 중수처리시설을 통해 생활하수와 빗물을 재활용한 것이다.
T6는 운영사무실을 비롯해 강의실, 원형회의실, 카페테리아 같은 커뮤니티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지하 2층이지만 지상과 연결되는 T6의 가장 아래층은 ‘카페 탱크6’이다. 탱크의 원형 구조와 높이를 살려 디자인된 꽤 넓은 공간 가운데는 원형 회의실이 있고,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면 달팽이 모양의 오르막으로 길게 이어지는 복도 형태의 전시공간도 볼 수 있다. 석유탱크 모양을 그대로 살려 중앙 기둥을 중심으로 돌아 오르게 한 것이 특징으로, 끝까지 오르면 탁 트인 옥상마루에 닿는다.
커뮤니티센터 T6 앞으로는 매봉산 능선을 따라 산책로도 마련되어 있다. 문화비축기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매봉산 전망대로 이어지는 코스이다. 주출입구 쪽 안내동 뒤, 혹은 T5의 오른쪽 산으로 난 길을 이용해도 산책로로 연결된다. T5 쪽에서 출발할 경우 15분 정도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문화비축기지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파빌리온 T1은 다른 탱크들보다 규모가 확실히 작다. 석유비축기지 시절에 휘발유를 보관했던 가장 작은 탱크로, 지금은 콘크리트 옹벽 안에 유리로 벽체와 지붕을 만들어 매봉산의 암반 지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복도처럼 길게 이어진 입구를 통과해 안쪽 탱크에 이르면 투명한 유리 너머로 암벽과 초록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 이곳 역시 전시, 워크숍 등을 위한 다목적 공간으로, 밤에는 별도 관찰할 수 있다.
이처럼 문화비축기지는 공간 대부분의 쓰임이 열려 있다. 수시로 강연과 전시, 무료공연이 열리며 재미있는 축제가 기획되기도 한다. 가장 빠르게 소식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SNS를 활용하는 것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페이지로 최신 정보를 소개하고 있으니, 문화로 출렁이는 공간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예의주시해 보길. 아는 만큼, 관심을 두는 만큼 발견하게 될 테니까.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T3 탱크 원형. 문화비축기지 내 5개의 탱크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용 시간
(공원) 24시간
(전시) 10:00~18:00
(카페) 10:00~21:00
휴관일
(공원) 연중무휴
(전시) 매주 월요일
관람 요금 무료
SNS (페이스북·인스타그램) culturetank
주소 서울시 마포구 증산로 87
문의 02-376-8410

1번과 2번 탱크를 해체하며 나온 철판을 재활용해 외관에 부착한 T6. 카페, 강의실 같은 커뮤니티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소통의 시작을 알리는 영상 작품
「기록의 시간여행」

이야기관 T5 1층 영상실에서 안택규 작가의 영상작품 「기록의 시간여행」을 감상할 수 있다. 세상과 단절되었던 석유비축기지의 소통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어두운 탱크 내부 벽면 전체를 스크린 삼아 압도적인 영상이 약 4분 동안 상영된다. 한 줄기 빛을 시작으로 공간을 점차 확장시켜나가는 움직임은 공간의 채움과 비움을 반복하는데, 이는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고 있다. 가장자리의 벤치 또는 바닥의 오일 스툴에 앉아 자유롭게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영상실 운영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영상작품은 매 시각마다 15분 간격으로 상영된다.

정은주 객원기자 사진 김성헌 객원사진기자

[2017-11-30]조회수 :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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