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나라
202009.24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드는 곳
청파동에서 서울로7017까지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며 많은 사람이 달력을 뒤적인다. 그리고 빨간 날을 찾곤 이내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운다. ‘이날엔 꼭 어디론가 떠나야지’라고. 그러나 놀 날을 잡으면 꼭 일이 생긴다. 어느 작가는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우리 일상도 여행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서울로 여행 온 외국인이라면…. 서울을 낯선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그래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면 서울역으로 가보자. 여행을 떠나온 사람과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그들을 보며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서울역의 서부역 맞은편 청파동에서 서울로7017을 걸어보자.

청파동, 서계동 일대 이야기를 담은 만경청파도

 길을 걷다
골목과 골목이 미로처럼 엉켜 있는 동네 탐방
청파동은 서울 토박이가 아닌 이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서울역을 한 번이라도 이용했다면 지나쳐 갈 수 있었겠지만 실제로 이곳을 직접 걸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청파동. 푸른 언덕이 있는 곳이라 그리 이름 지어진 동네를 걸으려면 골목과 골목을 잇는 높은 계단을 오르내릴 체력이 필요하다.
기찻길 옆의 청파동에 대해 동네 주민들은 ‘과거엔 꽤 좋은 집들이 즐비한 부촌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며 양옥, 연립주택과 빌라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빼곡하게 들어서 동네 사람이 아니면 길 찾기가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인근의 높은 빌딩 때문에 멀리서는 동네가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아 쉽사리 지나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처럼 서울의 오래된 동네 중 옛 모습을 간직한 반가운 동네들은 간혹 과거의 국가 시설들이 있어 휘몰아치던 개발 바람을 피해간 곳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은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동네임을 깨닫게 해준다. 청파동이 생각보다 커서 산책 코스를 단순하게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서울역의 서쪽인 서부역 맞은편 청파동 끝자락에 자리한 서계동에서 시작해 서울로7017로 가는 길을 택했다. 얼핏 간단해 보이는 이 코스는 서울이 성장하며 지나온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여정이기도 하다.
먼저 청파동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집이 빼곡하게 들어선 언덕이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청파동 끝자락에 자리한 국립극단이 눈길을 끈다. 과거 국군기무사령부 수송부대가 있던 곳을 구조는 그대로 두고 빨간 건물로 리모델링한 이곳은 과연 청파동의 홍일점이라 할 만하다.
국립극단을 지나 청파로 85길로 들어서 5분이 채 안 되는 거리에 구멍가게 하나가 눈에 띈다. 청파동을 대표하는 명물로 유명한 이곳은 100년 넘게 청파동 터줏대감을 자청하는 ‘개미슈퍼’다. 특히 외국인에게 더 유명하다는 이곳은 2011년부터 차효분 씨가 운영하고 있다. “글쎄요. 제가 바로 앞집에서 태어났는데, 그때부터 할머니께서 운영하셨으니 오래되긴 했죠”라고 말하는 그는 1대 가게주인 할머니가 운영하던 모습 그대로 가게를 운영한다. 역 앞이라 옛날부터 여관이 많았던 지역은 시대 흐름을 타고 게스트하우스로 변하며 여전히 서울을 찾는 많은 여행객의 쉼터가 되고 있다. 차 씨는 서울에서도 가장 시골 같은 곳이 이곳 청파동이라고 들려준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추억의 장소가 되고 있는 개미슈퍼. 벽면에는 그동안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의 인증사진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요즘은 장사가 그리 신통치 않아요. 대부분 역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느라 우리 같은 구멍가게에서 많이 사지 않죠. 그래도 이 슈퍼가 없으면 섭섭하지 않겠어요?”
서울에서도 가장 시골 같은 곳, 그렇게 천천히 청파동의 오래된 골목을 걸어보자. 무청을 시래기로 만들어 대문에 걸어놓은 모습, 우리도 찾기 힘든 골목길을 트렁크를 끌며 숙소를 찾아가는 외국인들, 사이 좋아 보이는 노부부가 산책하는 모습 등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심심할 겨를이 없다.
물론 산책이라고 하기엔 조금 가파른 계단을 만날 수도, 땀이 살짝 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떠랴. 바둑판처럼 잘 짜인 신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골목의 정겨움을 만날 수 있는데 말이다.

1_ 푸른 언덕, 청파동에서는 어렵지 않게 계단을 만날 수 있다.
2_ 개미슈퍼 사장님과 손님들이 함께 찍은 수많은 인증사진
3_ 100년 넘는 역사를 간직한 ‘개미슈퍼’

 그곳에 가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면 보이는 것들
청파동 일대와 서계동을 걸었다면, 이제 발걸음을 서울로7017로 옮겨보자. 2017년 5월 20일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만리재와 남대문시장을 이어주는 서울로7017은 2015년까지만 해도 차만 다닐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서울의 많은 고가가 철거되었지만 서울역 고가만은 재생 프로젝트에 따라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길로 재탄생했다. 서울역 고가의 보존은 우리에게 낡고 오래된 것은 무조건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그야말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사했다. 사실 서울의 수많은 고가는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이룬 역사적 증거였지만, 안전성이 문제되면서 철거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역 고가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철거보다 보존을 선택함으로써 좋든 나쁘든 우리가 겪어야 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겨놓게 되었다. 1975년 서울역 고가가 생기기 전에는 서울 도심을 차지한 서울역과 철도 때문에 남대문시장이 있는 회현동과 청파동, 중림동 지역 주민들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마치 커다란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직선으로 가면 빠른 길을 어쩔 수 없이 빙 둘러서 가야 했다. 특히 이 지역에 많이 있던 봉제공장 상인들이 남대문시장으로 물건을 싣고 다니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서울역 고가는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하려고 만리재와 퇴계로를 이어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차가 아니라 사람이 다니는 길로 새로운 역사의 한 장을 쓰고 있다.
그런데 서울로7017은 산책을 하기엔 조금 심심한 길이다. 직선으로 이어진 길 위에는 크고 작은 화단이 있지만 오밀조밀하지는 않아 아직 볼거리가 풍성하지 않다. 청파동, 서계동, 만리동 주민들은 생활하는 데 편리할 수 있지만, 그런 기능적 용도 외에 무슨 특별한 즐거움이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면 서울로7017을 걷다 잠시 발걸음을 멈춰보자. 때론 걷는 것보다 제자리에 멈춰 주위를 둘러볼 때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길 중간중간에 자리한 작은 부스에 들러 잠시 쉬어도 가고, 유리창으로 만들어진 바닥으로 고가 밑을 보는 재미 말고도 서울로7017에는 볼 것들이 꽤 있다. 오래된 서울역 모습이 주는 정겨움, 왼쪽으로는 저 멀리 중림동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약현성당이, 가운데에는 숭례문이, 그리고 남대문시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오른쪽으로 올려다보면 드라마 미생 의 촬영지로 유명한 옛 대우빌딩을 볼 수 있다. 또 밤이 되면 대형 전광판에 각 기업들의 광고가 낮보다 더 눈에 들어온다. 마치 수많은 기업이 뉴욕의 타임스스퀘어 전광판 광고를 희망하듯이, 기업 대표들도 한 번쯤 이곳에 서서 전광판에 광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많은 사람이 서울로7017을 걸으며 뉴욕의 랜드마크가 된 하이라인파크를 떠올린다. 물론 아직은 많은 것이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개방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서울로7017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데는 분명 시간이 걸린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정성스럽게 가꾸다보면 언젠가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지 않을까?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서울역 서편의 서부역에서 밤에 바라본 청파동 일대

 발견하다
삶이 더 풍성해지는 연극 한 편 어떠세요? ‘국립극단’
서울역 서쪽인 서부역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빨간 건물에는 관객들 사이에서 ‘빨간 극장’으로 불리는 (재)국립극단이 있다. 옛 국군기무사령부 수송부대를 리모델링해 2010년에 문을 연 서계동의 국립극단은 1950년 창단 이래 우리나라 극예술을 대표하는 연극전문 단체로 자리 잡은 백성희장민호극장과 소극장 판 그리고 사무동으로 나뉘어 있다.
2015년 명동예술극장과 통합된 국립극단은 각각 특성이 뚜렷한 전용극장 세 곳에서 연간 15편 내외의 공연을 선보인다. 백성희장민호극장과 소극장 판은 레퍼토리 작품들로 관객들에게 친숙한 공연을 선보이는 명동예술극장과 달리,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연극계 원로인 백성희 선생과 장민호 선생을 기리려고 마련한 백성희장민호극장은 작가 중심 극장으로 운영하며 참신한 창작극을 발굴한다. 200~400석까지 객석 운영이 가능한 이곳은 연출자 의도에 따라 마당극 형태는 물론 프로시니엄, 대칭 등 자유로운 공간 활용이 가능한 실험적 극장이다. 또 연출 중심 극장인 소극장 판은 가변적인 무대에 젊은 연극인들이 실험성 강한 작품을 올릴 수 있으며, 관객 200명 이상이 함께 볼 수 있다.
특히 매년 여름에 진행되는 ‘한여름밤의 작은 극장’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연극 작품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어 시민들의 호응이 높다. 게다가 어느 공연장에서도 보기 힘든 탁 트인 잔디밭에서는 길거리 공연 형식을 띤 퍼포먼스로 도심 속 작은 축제의 장이 펼쳐진다.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는 2017년 재외한인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했던 ‘한민족디아스포라전’ 가운데 가장 뜨거운 호응을 얻었던 「가지」를 공연할 예정이다. 「가지」는 아버지의 죽음을 앞둔 재미교포 2세 이야기를 음식이라는 소재로 풀어낸 작품이다. 문화, 언어, 성격, 입맛 등 아버지와 너무 다른 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을 담았다. 제54회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한 이 작품을 연출한 정승현은 ‘죽음이 뭐죠?’라는 대사에 집중하며 진짜 죽음이 무엇인지 고민했다고 한다. 「가지」는 2월 21일부터 3월 18일까지 공연한다.
주소 :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 373(서계동 1번지) / 공연문의 : 1644-2003

1_ 예상치 못한 만남을 선사하는 국립극단 2_ 소극장 판은 가변이 가능한 무대 연출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가능하다. 3_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국립극단의 소극장

하정희 객원기자 사진 김성헌 객원사진기자

[2018-02-06]조회수 : 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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