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나라
202009.21
승진은 완장인가

 

직장인에게 젖과 꿀은 ‘월급’과 ‘승진’이다. 제아무리 자아실현이라는 엄중한 명분을 가져와도 이 양대 산맥을 앞서긴 힘들다. 그런데 직장인들의 양대 축 중 하나인 승진제도에 새바람이 불고 있다. 창의와 혁신을 이야기하지만 좀처럼 변하지 않은 군대와 유교식 조직문화의 철옹성을 승진제도로 깨뜨리고 있다.

승진제도에 왜 혁신 바람이 부는가
새 정부가 출범한 이후 청와대를 비롯해 정부 부처, 공공기관의 변화를 위해 저마다 인사혁신안을 발표했다. 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인사혁신안엔 다양한 항목이 있지만, 그 중심에는 승진제도가 있다. 변화하는 승진제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근태에서 업무 중심으로의 이동’이다. 승진제도를 바꾸려는 기업들의 움직임은 제4차 산업혁명, 경쟁 가속화, 노동시장 환경 변화 등과 관련이 깊다. 급속도로 변하는 경영환경을 위해 변화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도태될 수 있고, ‘가볍고 빠르고 창의적인 조직’을 위해서 승진을 전향적인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 것이다.
승진과 관련된 재미있는 경영 이론이 있다. 미국의 교육학자 로렌스 피터는 1960년에 피터의 법칙을 제시했다. ‘조직에서 모든 직원은 자신의 무능력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승진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이다. 이론에 의하면 직원들은 업무능력을 입증하는 한 계속 승진한다. 그러다 결국에는 전문성이 없는 자리까지 맡게 된다. 조직에서 어떤 직책의 적임자를 선택할 때, 그 직책에서 요구되는 직무수행 능력보다 지원자가 현재까지 보여온 업무성과에 기초해 평가하는 경향이 높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직무수행 능력이 부족한 직원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그들의 수준으로 부하를 평가하는 악순환이 지속된다.
하지만 이제 기업들은 ‘뛰어난 엔지니어가 관리자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을 모두 갖춰야 할까?’라는 의문을 던지며 승진을 전향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능력과 업무 중심으로, 셀프 승진도 가능
최근 기업에 불고 있는 승진제도의 혁신은 크게 네 가지 형태를 띤다.
첫째, 직급체계가 축소됐다. 삼성전자가 지난 3월 기존의 ‘사원1(고졸)~부장 7단계’ 직급 대신 개인의 직무역량 발전 정도를 나타내는 CL(커리어 레벨) 1~4 체제를 도입한 게 기폭제가 됐다. 역량만 갖춘다면 나이와 연차 관계없이 팀장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현대카드는 ‘4(사원)-4(대리)-5(과장)-5(차장)년’의 제한을 없애고 진급한 지 2년이 지나면 승진 대상에 오른다. SKC도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이라는 5단계 직위 체계를 없애고, 입사 8년 차 과장도 팀장 직책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지금까지는 팀장 후보군에 들려면 평균 17년 이상 근무하며 모든 단계를 거쳐야 했다. LG이노텍 역시 6년 차 젊은 인재가 조직을 직접 이끄는 팀장을 맡을 수 있다. 팀장이나 해외주재원도 ‘사내 공모제’를 통해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 새로운 제도 아래에선 도전의식과 그 업무에 가장 전문성을 갖춘 인재가 팀장이 되고 빠르게 승진한다. 과거와 달리 인터넷 환경이 변하면서 젊은 인재들의 출중한 능력이 필요한 업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둘째, 호칭도 변했다. SKC는 직위체제 폐지와 함께 호칭도 ‘매니저’로 통일했다. 네이버는 ‘이사’라는 임원 직급을 없앴는데, 직급이 사라지면서 이들은 ‘리더’로 불린다. 임원뿐 아니라 부장급 이하 직원들도 직급이 없다보니 ‘님’으로 통일했다. 카카오 역시 직급이나 호칭 대신 영어 닉네임으로 부른다. 임지훈 대표의 닉네임은 ‘지미’다. IT기업을 중심으로 ‘대표이사’ 대신 ‘의장’, ‘부장’ 대신 ‘책임’, ‘프로’로 교체해 호칭에서부터 직원 간의 거리감을 없애고 수평적·자율적인 기업문화를 확산해 구성원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끔 돕고 있다.
셋째, 승진 평가자가 다양해졌다. 상향평가는 이미 많은 기업들이 채택하는 방식이지만 평가요소의 일부였던 것에 반해, 이제는 하급직원이 상급자를 직접 뽑기도 한다. 여행박사의 경우 직원들은 1년마다 대표를 직접 뽑는다. LG이노텍은 더 파격적이다. 사무기술직 전 직원을 대상으로 내년 초의 승진 심사부터 자기 자신을 진급 대상자로 추천할 수 있는 ‘진급 셀프 추천제’를 실시하고 있다. 반대로 본인이 원할 경우에는 진급연한을 미룰수도 있다.
넷째, 승진 이후의 보상이 달라졌다. 승진을 완장이 아닌 도약을 위한 스텝 중 하나로 인식하면서부터다. ‘별단다’고 표현될 만큼 임원 승진은 직장인에게 로망이다. 하지만 네이버는 임원급이 되면 나오던 차량, 독립적인 근무공간, 회원권, 비서 등을 없앴다. 대신 그만큼을 연봉에 포함시켰다. 오히려 연차가 낮아도 뚜렷한 성과를 낸 직원에게 법인차량과 운전기사 제공 같은 혜택을 준다. 카카오 역시 임원을 위한 특별한 복지혜택이 없다. 대신, 네이버나 카카오 모두 임원도 정규직으로 바꿔 고용안정을 꾀하고 직원과 동일한 신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색다른 보상을 제공하는 기업도 있다. 한화는 과장 이상으로 승진할 때 1개월간 안식월을 준다. 휴식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새롭게 부여된 직책에 대한 각오와 계획을 차분히 설계하기를 바라서다.

인사혁신의 명과 암
많은 기업들이 인사제도를 혁신하는 것은 글로벌 IT기업이나 스타트업처럼 활력 넘치고 발 빠르게 대응하는 기업으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기업들은 능력 중심의 수평적인 기업문화가 직원들을 고무시킬 것으로 예상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은 조금 다르다. 연공 중심의 직급체계를 없애는 것은 직원들의 주체성을 키우고 신속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열심히 일하게 되는 원동력을 잃게 할 수도 있다.
승진은 인간이 가진 사회적 욕구 중 하나다. 그 보상이 줄어드니 입사 초년생들은 “열심히 일해야 할 동기가 하나 없어졌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높은 직급을 빨리 다는 것 또한 달갑지 않다. 그만큼 빨리 나가라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임금도 문제다. 많은 기업들이 매년 임금을 재산정할 때 ‘연봉제’와 함께 직급이 높아질때마다 임금도 오르는 ‘호봉제’를 혼용하고 있다. 따라서 오히려 월급이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연차나 권위보다 실력으로 평가받는 문화도 중요하지만, 스타트업이나 IT업계의 인사혁신 제도를 제조업, 서비스업, 공공기관까지 모두 적용할 필요가 있냐는 반론도 있다. 국내 주요 상장사의 직원 평균 근속연수는 11년이지만 네이버는 평균 5.3년, 엔씨소프트는 4.9년에 그친다. 그만큼 경쟁이 심하다는 의미다. 인사제도의 변화는 경쟁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기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면 곧바로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크다.
공감을 얻지 못한 제도는 제 기능을 발휘하기 힘들다. 새 제도가 제 빛을 발하려면 직원들의 우려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

최윤경 전문기자

[2017-10-31]조회수 :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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