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나라
202010.27
500원 주유하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비케이메디케어 박영준 대표의 재기 스토리

기업 경영자에게 실패는 숙명과도 같다. 32년간 두 차례의 부도와 숱한 고비를 넘어온 ㈜비케이메디케어 박영준 대표에게도 실패는 언제나 굳은살이 박이지 않는 생생한 아픔이다. 고비 고비를 넘어 2013년 자체 브랜드의 열망을 담아 과감하게 설비투자를 단행했다가 회사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던 박 대표는 천신만고 끝에 재기에 성공해 지난해 2월 공장을 준공하고, 마침내 글로벌 3M의 아시아태평양 허브 제조공장으로 낙점을 받았다. 재도전 금지의 신이 있다면 이제 다 틀렸다고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내저었을 게 분명하다.

박영준 대표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온다’ 32년 경영자의 내공
지난해 3월 29일 박영준 대표는 하루 종일 손님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가슴 벅찬 기분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이날은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제약사 관계자들을 초청해 2년 반 동안 준비해온 공장을 오픈하는 날이었다. 2013년 일회용 밴드 제조기업 ㈜비케이메디케어를 설립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각종 첨단장비에 클린룸 시설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공장을 공개하는 박 대표의 어깨에는 절로 힘이 들어갔다.
36억 원의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마련한 자가 공장에는 OEM 제조기업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박 대표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겼다. 임대 공장을 빌려 생산하다 보니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추기가 여의치 않았고, 그러다 보니 고객사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주요 고객사인 한국3M에 대한 매출 의존도가 95%에 이르는 상황은 박 대표의 고민을 깊게 했다. 거래처를 늘리지 않고는 또다시 위기가 닥쳤을 때 생존의 갈림길에 설 수도 있다는 본능적인 위기의식이 박 대표를 움직였다.
공장을 공개한 이후 작년 말까지 1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고객사가 6곳이나 늘었다. 또한 글로벌 3M의 아시아태평양 허브 제조공장으로 낙점을 받았다. 3M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산재한 제조공장 중 한 곳만 남기고 철수하기로 결정한 이후 대만과 한국을 최종 저울질했고, 결국 한국의 손을 들어줬다. 3M이 한국에서 철수할 경우 비케이메디케어는 회사의 존폐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안 될 때는 어떻게 해도 안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기회가 오더군요. 그 기회를 잡으려면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죠.”
어쩌면 또 불어닥쳤을지 모를 위기를 기회로 만든 박 대표의 32년 내공을 엿볼 수 있는 일갈이다.

이지픽㈜비케이메디케어가 3M의 아시아태평양 허브 제조공장으로 낙점받는 데 큰 역할을 한 ‘이지픽(Easy Pick).’

OEM 제조 제품비케이메디케어는 국내 주요 제약사의 일회용 밴드와 반창고를 OEM 제조하고 있다. 최근에는 피부 트러블 부위에 진정효과를 발휘하는 기능성 하이드로 패치를 생산해 화장품 시장에도 진출했다.

두 번의 부도에도 내려놓을 수 없었던 기술부심
박 대표가 첫 창업을 한 것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지 2년 만인 1988년의 일이다. 엔지니어였던 형과 함께 항공기 부품과 산업자동화기계를 생산하는 작은 회사를 차렸다. 기술력이 뒷받침되어서인지 회사는 매출 100억 원을 넘길 만큼 고속 성장을 했다. 1993년에는 부산에서 항공기 부품 1등 기업의 자리에도 올랐다. 그렇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무렵 사고가 터졌다. 항공기 부품 1차 벤더가 되기 위해 은행을 정년퇴직했다는 사람을 회장으로 앉혔는데, 알고 보니 기업 사냥꾼이었다.
“사기조직원 3명이 더 있더군요. 은행을 방문했을 때도 지점장인 것처럼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대표였던 형이 백지 당좌수표 20장과 인감도장을 맡긴 것이 화근이 됐다. 회장이라는 작자가 사라지고 어음이 돌아오기 시작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6개월간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와 28억 원을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시 직원만 48명이었다. 장비를 헐값에 처분해 직원들에게 3개월치 월급과 퇴직금을 정산해주고 회사를 정리했다. 그리고 박 대표는 1년간 폐인으로 살았다.
“사람을 못 믿겠더라고요. 저한테 말만 걸어도 사기꾼으로 보였어요. 가족도 지인들도 다 등을 돌리더군요. 지인들에게 빌린 10억 원의 빚을 못 갚은 게 가장 뼈아팠죠.”
짧은 방황을 마친 박 대표는 예전 회사 직원들 3명과 함께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서야 했다. 문래동에서 낮에는 도면을 그리고, 밤에는 공장에서 기계를 빌려 돈을 벌었다. 자동차 번호판에 각인을 하는 마킹기를 제작했는데, 제법 잘됐다. 그것이 발판이 되어 1996년에 과수농가와 화훼농가의 병충해 작업에 쓰이는 유황훈증방재기를 개발해 특허를 냈고, 농협과 직거래를 하면서 돈이 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IMF 사태가 터지고 화훼농가가 직격탄을 맞으면서 결국 두 번째 부도를 맞았다. 담배 살돈도 없을 만큼 바닥까지 내려갔다. 길거리에 떨어진 꽁초를 주워 한 모금 빨던 순간의 처량했던 기분과 주유할 돈이 없었을 만큼 절박했던 당시의 심정을 박 대표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차를 몰고 가는데 기름이 없는 겁니다. 기어를 중립에 넣고 가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주머니를 뒤지니 100원짜리 동전 5개가 나오더군요. 가까운 주유소에 들어가 직원에게 500원어치 주유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데,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바라보더군요. 그 직원의 눈빛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허망하게 꺾인 내 브랜드에 대한 열망
두 번의 부도도 박 대표를 멈추게 하진 못했다. 이미 사업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믿고 따라와준 3명의 직원이 그의 곁에 있었기에 멈출 수가 없었다.
“집에 압류 딱지가 붙어 모든 것을 빼앗아갔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기술은 아무도 못 가져갔습니다.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저를 계속 도전하게 만들더군요.”
우연한 기회에 골프공 자동 티업기(tee-up machine)를 개발해 재기에 성공한 그가 일회용 밴드 제조기에 집중하기 시작한건 2005년의 일이다. 첫 창업 시절인 1989년부터 일회용 밴드 제조기를 개발해 제작하던 박 대표는 다른 사업을 하면서도 밴드 제조기 사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티업기 시장의 성장세가 꺾이고 경쟁사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본업에 집중하기로 결심한 박 대표는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막 나오기 시작한 로터리 타입의 밴드 제조기를 국산화했다. 그러나 국내 밴드 시장 자체가 작았던 탓에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그러다 2008년에 밴드 시장이 다양화되면서 드디어 박 대표에게도 기회가 왔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밴드 시장에 고가의 제품이 등장할 것으로 예견하고 생산성이 높은 로터리 타입의 제조기를 개발한 것이 주효했다. 현재 국내에서 제조되는 일회용 밴드의 95%는 비케이메디케어의 모기업인 부건오토시스의 밴드 제조기로 생산된다.
일회용 밴드 제조기 보급이 일단락되면서 박 대표는 슬슬 자신의 브랜드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2011년부터 준비를 시작해 2013년에 일회용 밴드 제조기업 비케이메디케어를 설립하고 ‘원에이드(ONE AID)’라는 자체 브랜드를 론칭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박 대표는 밴드 제조기를 만드는 것과 밴드를 직접 만드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인지도가 없다 보니 기존 브랜드를 당해낼 재간이 없더군요. 임대 공장에 28억 원을 투자해 최고의 설비까지 들여놓았는데, 제품이 팔리지 않으니 결국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직원들 월급을 두 달이나 밀릴 정도로 사정이 급박해졌죠.”
회사를 포기할 수 없었던 박 대표는 OEM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개발한 트러블 전용 패치 ‘이지필(Easy Peel)’을 한국3M에 제안해 독점 판매권을 주는 대신 전체 물량을 비케이메디케어가 생산하는 조건으로 OEM 생산을 시작했다. 제품은 대박을 쳤고, 비케이메디케어는 안정적인 수입원을 마련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박영준 대표의 손두 번의 부도와 숱한 위기에도 박영준 대표는 그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일어났다. 전재산을 잃어도 머릿속 아이디어만은 빼앗기지 않았다는 엔지니어로서의 자부심이 그를 일으켜세웠다.

대한민국 경영자의 끓는점 박영준℃
그렇게 6년이 흐른 지난해 3월 29일, 박 대표는 드디어 자가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했다. 3M의 아시아태평양 허브 제조공장이 되면서 기회는 활짝 열렸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전체 물량을 책임지는 만큼 2019년 30억 원대인 매출이 올해는 100억 원대로 올라설 전망이다. 자체 브랜드 생산의 꿈도 이뤘다. 자체 브랜드 ‘원에이드’의 생산이 재개됐고, 수출용 브랜드 ‘닥터스밴드’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해외 진출이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 작은 기업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몸소 체험한 박 대표는 밴드 시장의 잠재력이 높은 중앙아시아 시장 진출을 서둘러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지원사업으로 제조공장을 준비 중이며, 지난 7월에는 키르기스스탄에 공장을 오픈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2월에는 첫 수출이 시작됐다.
이렇게 한발 앞서 준비를 하는 그도 “조금만 더 일찍 준비했더라면 사업이 훨씬 순조로웠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틴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자부했다.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3명의 직원들에게 아파트와 자가용을 선물할 만큼 여유도 생겼다.
다시 태어나도 사업을 하겠냐는 질문에 한동안 답변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는 “다른 일을 했더라도 그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지 않았겠냐”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여러 차례 바닥까지 내려가본 그에게도 다시 일어서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다. 어쩌면 그에겐 ‘기업 경영’과 ‘실패’가 이음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또다시 위기가 와도 그의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있는 한 숙명을 받아들이듯 다시 일어설 것이 분명하다.

임숙경 전문기자 사진 김윤해 객원사진기자

[2020-01-10]조회수 :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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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zltvCit [작성일 2020-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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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wdxfiSKYNC [작성일 2020-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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