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나라
202012.04
한국 기업인의 인종차별 득보다 실
나인호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세기 말 독일의 사회인류학자인 오토 암몬(Otto Ammon)은 “국가는 기업 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도록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국가가 약자인 중소기업 등에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회인류학자인 그가 이런 주장을 했다는 사실은 조금 생뚱맞아 보인다. 하지만 비밀은 그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였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자연의 보편적인 질서인 경쟁을 통해 우수한 자는 살아남고, 열등한 자는 도태된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그러니 열등한 것에 별도의 도움을 주는 일은 자연의 질서를 어기는 잘못된 행위이다. 이 논리가 그대로 기업 정책에 투영되면, 열등한 중소기업에게 국가가 지원을 하면 이 역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다. 인종차별의 논리가 단지 인종의 문제가 아닌, 경제적 논리로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기업과 인종주의는 별로 관계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진 주제도 아니다. 스타벅스가 인종차별의 후폭풍으로 미국 내 8,300개의 매장을 일시적으로 닫은 일, 네덜란드 항공사 KLM이 한국 승무원의 화장실을 차별한 일은 여전히 우리 기억에 생생하다. 한국의 제조현장에 취업한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학대는 우리 기업인들도 결코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양사에서 인종차별의 주제에 관해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이룬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나인호 교수와 함께 인종차별의 역사와 뿌리, 그리고 우리 기업인에게 인종차별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지적 탐험을 떠나보았다.

나인호 교수

우선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인종차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의 방법이다. 예를 들어 지난 4월 독일 베를린의 지하철 안에서 한국 유학생 부부가 인종차별과 성희롱을 당했다. 그 뉴스를 본 다수의 사람이 분노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수의 독일인’이 한국인을 차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5월 초에는 캐나다인이 ‘마스크를 쓴 아시아 여성’의 얼굴을 무차별적으로 가격했다. 마찬가지로 ‘캐나다에도 이런 사람이 있어?’라고 생각하지만, ‘다수의 캐나다인’이 이럴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곧 인종차별이 매우 특수한 일탈적인 행위이고, 예의가 없고 지적 수준도 낮은 사람이 벌이는 일이라고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인류 역사에서 인종차별, 인종증오의 극단적인 형태는 독일의 나치즘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극히 일탈적인 사건’이고, ‘히틀러라는 정신병자에 가까운 사람이 만들어낸 극단적인 사건’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나인호 교수는 이러한 인식은 매우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백인종 우월주의, 인종차별의 뿌리 깊은 사상은 최소한 히틀러가 사망한 해인 1945년대까지만 해도 과학과 철학사상, 종교 등과 결합한 서양 사회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지금의 우리에게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돼’, ‘정부는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해’라는 생각은 매우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말이다. 바로 이와 동등한 수준으로 유럽인들에게 유대인, 아시아인, 흑인 및 기타 유색인에 대한 차별과 증오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생각’이었고, 상식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75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교수님께서는 《증오하는 인간의 탄생》이라는 책을 통해 ‘인종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말이 일반적인 ‘인종차별’과는 다른 의미인가요?
인종차별보다는 인종주의라는 말이 좀 더 넓은 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종주의는 세 가지 형태로 발전해왔습니다. 첫 번째는 일반적인 ‘인종우월주의’가 있습니다. 백인종이 신체적·지적·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다소 단순한 형태입니다. 두 번째는 ‘인종적 염세주의’가 있습니다. 우리와 다른 문화, 혈통,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우리 민족과 섞이면 우리의 우수성이 질적으로 저하되고 풍속과 도덕이 타락하고, 결과적으로 우리 민족이 멸망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인종증오’입니다. 우리와 다른 열등한 인종은 사악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협하는 적이므로, 모두 배제되어 사라져야 하고, 학살을 통해서라도 제거해야 한다는 가장 악랄한 형태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에 대한 분류법은 ‘인간 vs 인간이 아닌 존재’로 나뉩니다. 즉, 인간이 아닌 존재는 없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이 세 가지의 형태를 모두 합쳐 ‘인종주의’라고 부르며, 인종차별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차별적 행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의 인종주의는 어느 정도의 단계라고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초기의 인종주의만 해도 다소 휴머니즘이 남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 시민들은 다른 문명의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지만, 그들이 교육을 받고 인격을 수양하면 개선될 수 있다는 관점으로 봤습니다.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던 것입니다. 또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아름다운 신체를 가진 코카서스 인종(백인)은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문명화’되었고, 따라서 식민지에 거주하는 열등한 인종들을 ‘문명화시켜야’ 하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역시 변화의 가능성을 전제한 인식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온건한 형태의 인종주의가 민족주의, 국가주의와 결합하면서 점점 증오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영국에서 발현된 ‘우생학’이었습니다. 자신의 민족이나 국민을 엘리트 인종으로 바꾸자는 취지의 학문이었지만, 이는 결국 ‘우리가 엘리트 인종이 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없애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우리 민족 또는 국민의 생물학적 건강성을 해치고, 지적인 퇴화와 도덕적 타락을 유발하는 모든 인구집단을 배제하거나 말살시키자는 생각입니다. 무식하고, 도덕적이지 못하고, 근면함과 성실성이 없는 이민자들, 그리고 술에 절어 사는 노동계급, 매춘부, 마약 하는 사람들, 범죄자, 나아가 성적 소수자들을 ‘청소의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단종법(斷種法)’입니다. 아예 열등한 사람은 생식의 능력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단종법은 미국에서 최초로 입법되어 30개 주에서 거세작업이 실시됐고,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에서도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타인종을 극도로 비난하는 문화는 남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인종증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인호 교수

서양에서의 인종주의의 뿌리가 이렇다면, 과연 우리나라에는 언제 이 인종주의가 확산되었을까? 과거의 역사 그 어디를 뒤져봐도 우리는 그저 ‘백의민족’이었을 뿐, 타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민족을 ‘오랑캐’라고 부르기는 했어도 그들이 귀화를 청했을 때는 기꺼이 우리 민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문제의 시작은 구한말의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였다. 독립신문의 사설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아프리카 흑인은 인류에 속하지 못하는 자”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대한제국의 지리 교과서에는 “백인종은 황인종보다 우월하고, 황인종은 흑인보다 우월하다”라고 적고 있다. 우리의 시선이 아닌 서양의 시선으로 인종을 바라본 당시 일부 지식인들의 무비판적 관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일제강점기는 기름을 부었다. 당시 일본은 서양의 인종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그 전형이었다. 그는 ‘이기적인 나약한 겁쟁이’인 조선 민중은 일본이라는 엘리트 집단에 복종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인종주의적 논리를 설파했다. 또 이른바 ‘문둥병’이라고 불리던 한센인들이 과거에 마을 외곽에서 살던 것과는 달리 소록도라는 별도의 공간에 완전히 격리된 것도 역시 일제강점기였다. 한센병이라는 ‘열등한 종자’는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배제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는 곧 나치즘이 유대인을 솎아내어 수용소에 감금시킨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일본은 우리나라에 인종주의를 들여왔고, 당시 국내 친일파에게 인종주의를 확산하면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해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종주의는 정상적인 사고로 보면 극히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인류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또 수많은 시민혁명의 등장으로 시민계급이 성숙하는 등 진보해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과정에서 인종주의가 들어설 자리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서구 사회에서 인종주의는 매우 끈질기고 체계적으로 발전해왔습니다. 특히 초기의 ‘백인종 우월주의’가 점차 강화되면서 어느덧 ‘진보’의 이름으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피스크는 서부 개척사에 관한 책을 쓰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이 쫓겨나고 학살된 것은 역사의 진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즉, ‘열등한 인종의 학살=역사의 진보’ 개념이 형성된 것이죠. 심지어 인종주의는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던 사회주의와 결합되기도 했습니다. 마르크스가 썼던 《공산당 선언》의 말미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독일의 인종주의적 사회주의자는 “만국의 게르만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쳤습니다. 심지어 인종주의는 기독교와도 결합했습니다. 예수는 게르만 민족의 뿌리인 아리아 인종이며, 유대인을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라고 보았습니다. 인종주의는 유럽과 미국에서 보편적인 사상이었고, 이것이 공공 담론에서 사라진 것이 매우 역설적이지만 바로 나치의 홀로코스트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생스 투 히틀러(Thanks to Hitler)’라고 생각합니다. 히틀러의 극악무도한 인종증오와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인해 그간 유럽의 보편적 인종주의가 수면 아래로 내려가고, 정작 그 담론을 주도해온 유럽인들은 그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종주의는 여전히 ‘은밀한 형태’로 현대의 유럽과 미국에서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인종주의에 입각해 타 민족에 대해 경멸적인 표현을 할 때, 곳곳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장티푸스, 콜레라균과 같은 바이러스에 대한 언급이다. 1886년 호주의 한 잡지에 기고된 글에는 황인종(몽골인)들을 향해 ‘장티푸스를 퍼뜨리는 찻주전자’라고 표현했으며, 1895년에 반유대인민당을 창설한 저널리스트 알바르트는 유대인을 ‘전염력이 강한 콜레라균’에 비유했다. 오늘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굳이 ‘중국 바이러스’라고 부르는 것에는 단지 그 발원지가 중국 때문만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과거부터 있었던 ‘증오해야 할 인종=더럽고 유해한 세균’을 결합하는 전형적인 유럽과 미국 중심의 인종주의적 표현일 수도 있다.

교수님께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인종주의가 매우 강력해지고 있다고 진단하고 계십니다. 이런 인종주의의 폐해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일단 국가 이미지가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지난 2018년 하반기에 제주도에 들어온 난민으로 인해 매우 큰 사회적인 이슈가 발생했습니다. 그때 난민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청와대 국민청원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때 뉴욕타임즈와 CNN, 독일 언론은 ‘한국은 인종주의가 팽배한 나라’, ‘한국에서 외국인공포증이 확산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이런 뉴스들이 나오게 되면 국가 이미지가 순식간에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인종주의 문제가 가장 첨예한 곳이 바로 중소기업 생산현장이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조건에서 일하는 외국인노동자도 있지만, 심심치 않게 그들에 대한 학대와 차별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기업인들에게 인종주의는 어떤 의미일까요?
독일의 극우파들이 광장에 모여서 “외국인들은 너희 나라로 가라”고 한번 시위를 하면 미국에서 독일 자동차의 매출이 뚝뚝 떨어집니다. 미국 언론들이 이를 대서특필하고, 미국인들 사이에서 ‘독일인은 곧 나치’라는 오래된 표상이 다시 작동합니다. 따라서 직접적인 소비 성향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의 이미지가 전 세계적으로 매우 좋아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악, 영화, 드라마, 패션 등 수많은 분야가 선전하면서 한류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업에 인종주의가 팽배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세계라는 큰 시장에서 한국 상품이 설 자리는 점차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꼭 경제적인 이익의 측면에서만 접근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외국인노동자 역시 인간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한국 노동자와 동일한 단결권, 교섭권을 부여해야 하고, 정상적인 한국의 노동자와 동일한 대우를 해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나라 제조업 현장에서라도 외국인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가 지켜져야만, 우리 사회도 지금보다 한층 더 선진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는 인종주의가 확산하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면 배우자 얼굴이 바뀐다’, ‘장애아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집값이 내려간다’, ‘동성애자는 에이즈를 퍼뜨린다’, ‘조선족은 더럽고 범죄를 일으킨다’라는 말들에 모두 촘촘하게 인종주의가 섞여 있다. 여기에 남성 혐오, 여성 혐오가 겹쳐져 있으며, 여전히 위력적인 ‘빨갱이’라는 말 역시 우리 내부의 인종주의이기도 하다. 심지어 최근에는 ‘흡연충’이라는 말도 있고, ‘이태원발 코로나19 확산’으로 성적 소수자마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원래 선했고 아름다운 나라였다.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에 나오는 한 구절은 우리 사회의 인종주의를 걷어낼 수 있는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중략)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중략)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중략)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이남훈 기자 사진 김상헌 기자

[2020-06-04]조회수 :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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