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나라
202008.09
소부장 자립에 가속페달 밟다
日 수출규제, 그 후 1년

2019년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소재 등 3대 품목에 대한 포괄허가를 개별허가로 전환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8월 2일, 우리나라를 전략물자 수출 우대국인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했다. 우리 산업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만 해도 수출규제는 중국과 미국의 해묵은 싸움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언론도 연일 위기의식이 묻어나는 보도들을 쏟아냈다. 심지어 ‘한국 수출 직격탄’, ‘세계 경제 도미노 쇼크’라는 헤드라인이 등장했고,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미·중 무역분쟁에 버금가는 쓰나미가 올 것으로 전망했다. 아마도 당시 일본은 회심의 일격을 날린 기분이었겠지만, 그들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일본의 기술자립 방해, 이제 안 통한다!
반도체일본은 과거부터 주도적으로 우리나라의 기술자립을 방해해왔다. 1990년 초반, 국내 반도체 기업 D사는 컬러TV, 전자레인지용 고압 다이오드를 국산화해 공급해왔다. 이 기술은 일본에서도 단 2개 기업만이 보유한 기술이었다. 이때 일본 기업들은 담합해 무려 25%에 이르는 덤핑 공세를 퍼부었다. 결국 D사는 기술자립의 완전한 단계에 이르기 직전에 부도를 내고 말았다. 당시 이런 유형의 덤핑 공세는 꽤 흔한 일이었다. 전기제품, 초소형 모터, 유리, 환경제품까지 전방위적으로 일본 기업들의 방해가 있었고, 그때마다 우리 중소기업들은 좌절의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2019년 7~8월에 있었던 일본의 수출규제는 아마도 과거 일본 경제 관료들의 기억에 남아 있던 ‘승리의 기억’이 배경이 되었을수도 있다. 그러나 30년 동안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대한민국’에 머물지 않았다.
그 시작은 화이트리스트 배제 직후 정부가 마련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이었다. 일본이 직접 수출을 규제한 3개 품목에 이어 20여 개에 이르는 핵심소재 부품의 국산화와 수입처 다변화를 시작했던 것. 특히 수입처 다변화는 즉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우선 액체 불화소수의 경우 국내 공장을 증설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최대 2배가량 생산능력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했고, 제3국 제품도 즉각 테스트에 들어갔다. 기체불화수소의 경우 생산을 위해 신규 공장이 준공되기 시작했고 미국산 제품의 수입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유럽산 제품을 테스트하는 동시에 미국 기업인 듀폰의 투자를 유치하는 것은 물론, 국내 공급 기반을 강화했다. 이와 동시에 각종 규제 개선에도 속도를 냈다. 화학물질 인허가 기간은 75일에서 30일로 단축했고, 12개 사업장 1,275명에 대해서는 특별연장근로를 인가했다. 금융이 빠질 수 없다. 정부는 1,638건에 대해 3조 4,000억 원을 집행하면서 기업들에게 든든한 실탄을 쥐어주었다.
이와 함께 100대 품목의 공급능력도 대폭 늘렸다. 우선 재고량을 주 단위에서 월 단위로, 1개월 단위에서 3개월 단위로 총력적으로 늘리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으며, 43개 품목은 13건의 M&A와 7,000억 원 규모의 투자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 생산 능력을 늘렸다.

대학, 기업 나서서 ‘총공’
8월부터는 대학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KAIST와 서울대학교는 소부장의 공급 안정화를 위해 기술자문단을 구성하고 국내 중소·중견기업의 기술자문에 나섰다. KAIST는 명예교수 및 현직 교수들을 중심으로 100명의 자문위원단을 꾸려 기업현황 분석, 애로기술 진단, 문제해결까지 가능한 원스톱 서비스를 지원했다. 서울대학교 공대는 320명의 교수로 구성된 특별전담팀을 꾸려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전기전자, 기계금속, 화학소재 분야로 나눠 기술자문을 지원했다. 서울대학교 공대는 이미 4년 전부터 국내 산업의 기술독립에 대해 꾸준히 조언해왔다는 점에서 그간 쌓인 내부적 역량이 한층 더 빛을 발했다.
또 8월 말에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R&D 첫 번째 예타면제(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사업을 실시했다. 이는 당시 대외의존도가 높았던 제조장비 시스템 스마트 제어기 기술개발과 테크브리지 활용 상용화 기술개발에 적용됐는데, 사업을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술 발전의 원천은 결국 R&D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근원적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막강한 자본력을 무기로 한 대기업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효성은 탄소섬유 생산설비를 증설했고, 코오롱인더스트리와 SKC는 불화폴리이미드 자체기술을 확보해 시제품을 테스트하고 상용화에 앞서나갔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약진은 2019년 9월에 이르면서 일본의 규제품목인 액체 불화수소가 국산화 단계에 진입했다는 점이다. 당시 LG디스플레이는 국내 중소기업이 국산 원료로 만든 액체 불화수소에 대해 생산공정 적용 테스트를 마쳤다. 7월에 위기가 가시화 되었지만 9월에 이미 확실한 대안이 나왔다는 점에서 그 속도는 놀랍도록 빨랐다. 또 삼성디스플레이 역시 지난 11년간 일본이 독점해온 중소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핵심 부품인 ‘섀도마스크’ 국산화에 속도를 냈다.
중소기업들의 고군분투도 이어졌다. 동진쎄미켐은 EUV 포토레지스트 개발에 나섰으며, 솔브레인은 고순도 액체 불화수소 대량생산 능력을 확보, 이미 국내 기업에 납품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2월에는 DCT머티리얼과 나노종합기술원이 공동으로 그간 수입에 의존해왔던 메모리 반도체용 하드 마스크 소재를 개발해 국산 제품으로 대체를 가능케 했다. 필옵틱스도 그간 일본 업체가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OLED 기술의 핵심소재인 ‘파인메탈마스트(FMM)’에 도전하면서 국내 대기업들의 대일본 부품 의존도를 낮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소기업들의 기술자립 열정은 지난해 11월 본격화됐다. 정부에서 ‘소재·부품·장비 강소기업 100’을 선정하는 사업을 시작하자 총 100개 기업 선발에 무려 1,064개 중소기업이 참여했다. 물론 90%가 넘는 기업이 사업 선정에서 탈락하겠지만, 기술자립을 목표로 뛰겠다는 기업이 1,000개가 넘는다는 사실은 든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노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 6월 9일, 100대 핵심 품목을 중심으로 하는 ‘소재혁신 선도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이는 주력산업의 핵심소재와 부품의 근본적인 대외의존도를 해소하기 위한 산학연 연합 프로젝트다. 이 사업은 기존의 소재 연구와는 차별화된 방식을 도입해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등 관련 분야의 자립화를 위한 것으로, 향후 5년간 총 2,066억 원을 투자해 개발된 기술은 민간기업에 이전할 예정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2020년 1월 말에는 일본 언론도 우리나라의 기술자립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사히신문》은 한국의 기업이 고순도 액체 불화수소를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한 것에 이어 민간기업과 정부가 초고속 대책을 실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보도의 이면에 한국에 대한 놀라움도 들어 있었다. 일본 매체들은 ‘잠든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는 의미의 일본식 표현인 ‘잠자는 아이를 깨운 격’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특별전담팀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한 직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은 타격을 입은 소재, 부품, 장비 100대 품목의 공급 안정화를 긴급 지원하기 위해 특별전담팀을 구성했다.(출처: 서울대학교)

수출규제 반복돼도 끄떡없다! 자신감 충만
2020년 7월 현재, 과거 일본의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따른 위기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우리 정부와 기업의 위험관리 능력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현재 정부는 일본과 관련 있는 100대 품목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338개 품목을 감시하기 시작했으며, 소재·부품·장비 글로벌 가치사슬(GVC) 재편이라는 근본적 문제에까지 진입했다. 또 우리나라의 기술적 위상을 초고도화된 기술선진국으로 설정하고 ‘세계의 첨단공장’이 된다는 목표까지 세웠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일본의 수출규제로 원천기술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국방분야로도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지난 5월 말 ‘DMC융합연구단’을 출범시켰다. 이 연구단은 국방분야 핵심 반도체와 플랫폼 기술을 국산화하는 곳이다. 향후 2022년까지 전자식 기폭장치를 개발하기 위한 고전압 스위치 및 광센서 국산화 플랫폼 구축, 방산부품 모듈 통합 패키지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 등을 수행할 예정이다.
지난 1년간 일본의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따른 우리나라의 대응력은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아진 ‘K-방역’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워낙 다수 국민에게 밀접한 이슈이기 때문에 언론에 자주 보도되어 그 실상을 잘 알고 있지만, 일본 수출규제에 관한 이슈가 꾸준하게 언론에 등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면을 살펴보면 정부의 선도적인 지원과 규제혁파, 수입 다변화를 위한 노력,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아우르는 기업들의 발 빠른 대응은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방식이었다. 여기에 우리 국민의 ‘일본제품 불매운동’까지 겹치면서 마치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기술독립운동’을 펼쳤다.
이번 사태가 일어나면서 많은 전문가는 ‘일본 리스크는 이제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었다’는 진단을 했다. 언제든 일본의 수출규제가 다시 이뤄지면 우리는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다양한 대처방안 덕분에 이런 생각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이제 일본은 ‘예상 가능한 돌출 변수’ 정도에 불과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다. 기술은 매우 빠른 시간 안에 파괴적인 혁신을 거치면서 발전하기 때문에 기술에서 전통적 강국인 일본이 언제 다시 기술적 우위에 설지 모른다. 그러나 과거와 같이 수출규제가 반복되더라도 그에 따른 충격과 당혹감을 느끼기보다는 자신감으로 대처할 정도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 DMC융합연구단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지난 5월 국방분야 핵심 반도체와 플랫품 기술을 국산화하기 위한 DMC융합연구단을 출범시켰다.(출처 :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이남훈 기자

[2020-07-07]조회수 :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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