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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부캐 전성시대

‘나’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는 게 과연 가능할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자. 뒤돌아보건대 직장에서의 나와 가족 틈에서의 나, 그리고 혼자 있을 때의 나는 분명 같지 않다. 하지만 이것도 나, 저것도 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방송가를 휩쓸고 있는 부캐는 이 같은 다양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출발했다. 대중은 반응했고, 유쾌한 부캐 놀이에 시치미를 뚝 떼고 동참하는 분위기. 시시각각 캐릭터를 바꾸는 능력이 기본 사양이 된 지는 오래다. 바야흐로 부캐의 시대가 열렸다.

게임 용어에서 시대의 대세 키워드로

대체 부캐가 뭐기에? 요즘은 너도나도 부캐를 외친다. 일단, 결혼식장에서 신부 손에 들린 부케(bouquet)와는 다른 말이다. 부캐란 쉽게 말해 ‘부(副)캐릭터’의 줄임말. 온라인 게임에서 본래의 캐릭터인 본(本)캐 이외에 플레이 연습이나 이벤트 참여, 경험치 획득 등의 이유로 새롭게 만든, 또는 키우는 캐릭터를 지칭하던 것이다.
부캐는 2000년대 초에 생겨난 말이지만 게임과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는 생소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은 개인이 상황에 맞게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 다양한 정체성을 표현한다는 의미로 널리 사용된다. 특히 미디어 콘텐츠 시장에서의 등장이 눈에 띈다.
텔레비전을 켜면 각종 프로그램에서 부캐를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데, 방송에서의 부캐는 진짜인 듯 진짜가 아닌 캐릭터 놀이로 그려진다. 분명 익숙한 인물인데 시치미를 뚝 떼고 다른 사람인 양 설정되는가 하면, 주변인을 비롯한 시청자들은 알지만 모르는 척 역할놀이에 동화된다. 아니, 적극적으로 가담해 즐긴다는 게 더 맞겠다. 애초에 감쪽같은 변신은 목적이 아니므로 티가 난다 해도 문제될 건 없다. 허술함이 오히려 매력으로, 정교하게 세팅된 B급 감성은 부캐에 새로운 매력을 불어넣는다.

알지만 모르는 척, 함께 가담하는 쾌감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캐의 조상 격인 래퍼 마미손이 있다.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 핑크색 복면을 쓰고 출연한 마미손은 사실 래퍼 매드크라운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당사자는 이를 줄곧 부인하고 있지만. 개그우먼 김신영의 부캐인 둘째이모 김다비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45년생에 새벽 수영으로 시작하는 하루 일과부터 계곡 산장의 오리백숙집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까지, 섬세한 캐릭터 설정이 재미를 더한다. 기성세대를 향한 그의 속 시원한 발언도 대중들을 열광케 한 요인이다. 30대인 개그우먼 김신영이었다면 한계가 있었을 발언 수위가 1945년생 김다비의 입을 통함으로써 훨씬 유연해지는 것이다.
잠깐,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인 불확실성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빠르고, 이해관계는 얽히고설켜 있는 현대 사회. 따라서 현대인들은 유동적이다. 지속적으로 변화를 요구하고, 발 빠른 적응력을 보이며,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가능성을 활짝 열어둔다.
이 같은 특성은 부캐 열풍과도 분명 맞닿아 있다. 일단 부캐는 직관적인 콘셉팅이다. 확실하고도 명확한 콘셉트는 곧 콘텐츠의 매력으로 읽히는 터. 마케팅의 시대를 지나 콘셉팅의 시대로 진입한 현재, 그간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을 가능케 해주는 부캐는 콘텐츠의 유연한 확장이라는 결과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공고하게 구축된 세계관 안에서라면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변신을 꾀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부캐 열풍을 불러일으킨 개그맨 유재석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김태호 PD와 손잡고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부캐의 세계’를 콘셉트로 다양한 직업과 캐릭터에 도전했다. 신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 드러머 ‘유고스타’, 하피스트 ‘유르페우스’ 등으로 세포분열하듯 새로운 부캐를 생성하는가 하면, 한 술 더 떠서 함께 부캐 놀이를 할 캐릭터들을 소환해 세계관을 확장해가고 있다.

확대보기놀면 뭐하니의 유재석방송가에 부캐 열풍을 불러일으킨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 유재석은 프로그램상에서 트로트가수, 드러머, 음반제작자 등 다양한 부캐를 생성했다.

그야말로 부캐는 방송가를 휩쓸었고, 경계를 유머러스하게 무너뜨렸다. 고정된 배역과 플랫폼을 움직여 다양한 조합과 재조립을 시도했다. 물론 대중들은 카피추의 시치미를, 유재석의 연기를 꿰뚫고 있다. 그저 모르는 체 하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실제를 인정해버리는 순간 부캐의 세계는 사라져버릴 테니까. 부캐를 즐기고자 한다면 비밀 같지 않은 비밀이라도 철석같이 지키며, 논리 따위를 따지지 않는 정도의 태도쯤은 기본으로 갖추어야 한다.

현대인에게 두드러지는 멀티 페르소나

넓게 보면 부캐 열풍은 방송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확장됐다. 사실 이건 미디어 콘텐츠의 주요 소비층인 MZ 세대가 즐기는 놀이이기도 하다. 이들 MZ 세대는 뚜렷한 특성을 가진다. 태어남과 동시에 디지털 문화를 접한 터라 캐릭터라는 개념에 익숙하고, 다양한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집단보다 개인에 더 관심이 많아, 설정된 자아가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가에 주목하며 역할놀이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을 즐긴다.
바꿔 말하면 멀티 페르소나적 자아가 강하다고도 할 수 있다. 페르소나란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단어로, 멀티 페르소나는 여러 개의 가면 정도로 해석 가능하다.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인 성격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멀티 페르소나는 현대인의 특성을 관통한다. 2020년 트렌드 키워드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현대인들은 직장, 학교, 친구들과의 만남 등 상황에 따라 정체성을 바꾸거나 숨기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개의 SNS 계정을 만들어 각기 다른 콘셉트로, 보여주길 원하는 일부 모습만 편집해 내보이는 경우가 흔한 까닭이다.
실제로 시장조사 기관인 글로벌 웹 인덱스(Global Web Index)가 전 세계 소셜 미디어 트렌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 사람당 보유한 계정은 평균 8.1개에 달한다. 비교적 쉽게 계정을 개설할 수 있는 인스타그램의 경우 공개 계정을 지칭하는 ‘린스타(진짜 계정, real instagram account)’, 비공개 계정을 지칭하는 ‘핀스타(가짜 계정, fake instagram account)’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2030세대는 핀스타를 기꺼이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시선이 강했던 게 사실이지만, 요즘은 이를 개성이나 또 다른 정체성으로 인식한다.
이 같은 트렌드는 제품 브랜딩 방식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상품과의 협업 또는 색다른 카테고리로의 제품 확장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식품회사인 빙그레는 식품이 아닌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한 제품들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데, 스포츠 브랜드 휠라와 협업해 아이스크림 메로나 운동화를 출시하는가 하면 메로나 특유의 모양을 살린 칫솔, 수세미, 치약 등을 출시했다. 대한제분의 밀가루 상표인 곰표 굿즈도 2018년 출시 이후 꾸준히 인기다. 곰표 밀가루 북극곰 캐릭터와 로고 디자인, 패키지 디자인을 활용한 문구류와 의류, 스낵, 화장품, 맥주 등은 MZ 세대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곰표 맥주는 출시 3일 만에 10만 개 완판을 기록하는가 하면, 또 한 달 만에 50만 개 판매를 달성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는 온라인 플랫폼을 중심으로 B급 감성과 가잼비(가격 대비 재미의 비율)에 대한 니즈가 커진 데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확대보기메로나 모양 수세미아이스크림 메로나를 꼭 닮은 수세미. 빙그레는 식품 외에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한 제품들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풍성해진 부캐, 다양한 정체성의 발현

방송가에서 부캐가 뜨고 멀티 페르소나가 시대의 화두가 된 데는 인터넷의 발달과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 워라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직장 밖에서 또다른 자신을 찾으려는 시도가 많아진 것. 그 일환으로 다양한 취미활동을 경험할 수 있는 플랫폼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1교시는 직장에서, 2교시는 여기서 놀자’는 슬로건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연구하는 직장인 네트워크 플랫폼 ‘2교시’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을,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연결하는 커뮤니티를 운영한다. 재테크, 와인, 독서, 다이빙 등 분야도 다양한데, 참여 멤버 중 90%가 직장인이다.

확대보기직장인 네트워크 플랫폼 2교시 홈페이지직장인 네트워크 플랫폼 2교시. ‘1교시는 직장에서, 2교시는 여기서 놀자’는 슬로건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공유한다.

실제로 잡코리아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회사에서의 내 모습이 다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한 비율이 77.6%로 나타났다. 또 ‘멀티 페르소나 트렌드가 확산될 것’이라는 대답이 54.4%로 절반 이상이었으며, 이유로는 ‘개인의 특성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꼽은 이들이 61.2%로 가장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 덕분에 취미가 제2의 직업으로 발전된 경우도 요즘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본캐(본래의 캐릭터)인 직장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취미로 부캐를 만드는 셈. 초등학교 교사이면서 동시에 랩네임 달지로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달지, 회사생활 중에 일러스트 에세이 〈기억을 걷는 시간〉을 출간한 우은형 작가, 사진작가로서 전시회를 연 기업 오너 등, 취미로 부캐를 확실히 구축한 이들은 손에 꼽기 어려울 만큼 많다. 특히 유튜브가 활성화되고 코로나19로 비대면 시대가 열리면서 부캐는 더욱 힘을 얻기 시작했다. 실제로 직장인 4명 중 1명은 개인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라는 조사결과도 있다.
이처럼 새로운 자아, 즉 부캐로 보내는 시간과 경험은 정서적 만족감을 높여주며, 일상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위안으로 삼을 만한 점은, 여러 가지 가치 중에서도 재미가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자아에 혼돈이 생긴다면, 이 모습도 저 모습도 나라고 가볍게 인정해버리기를. 한결같은 모습만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대는 일찌감치 저물었다. 이제, 부캐도 능력이다. 이것저것 차치하더라도 일단 부캐로서 얻는 즐거움이 분명하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아니한가.

정은주 기자

조회수 : 338기사작성일 : 20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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