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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람을 읽다
평범한 삶의 이방인이자 휴머니스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 1853~1890

“안타깝고 불쌍한 미혼모와 함께 사는 게 뭐 잘못된 일인가? 모두가 날 정신병자 취급하려고 하는군. 그녀와 헤어지라는 테오 녀석도 정말 이해할 수 없어.”
경제적으로 유일한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는 고흐에게 시엥과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고흐는 그런 테오와 가족들이 못마땅하기만 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형제로 알려진 고흐와 테오. 19년간 형은 동생과 무려 668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나누었다. 그토록 끔찍하게 아끼는 테오였지만 사생활까지 간섭하는 것에는 괘씸하기만 했던 것이다.

확대보기고흐 일러스트

수많은 갈등과 혼란, 그리고 뒤늦은 화가의 길
1883년 고흐의 나이 스물여덟 살. 이때부터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당시 헤이그 변두리에 머물면서 한 여인을 만난다. 시엥이라는 이름의 미혼모이자 매춘부 여성이었다. 영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스무 살 시절, 하숙집 딸 외제니에 대한 짝사랑으로 첫사랑의 깊은 상처를 안고 있던 그였다. 이성에 대한 열정은 이미 식어 있었지만 동정과 인간애로 싹튼 시엥에 대한 관심은 그녀와의 동거에 이른다. 심지어는 성병에 걸려 함께 치료를 받기도 하지만 그녀와 헤어질 생각이 없었다. 시엥에게 새로운 삶을 찾아주고 싶었다. 고흐 자신은 나름대로 인간애의 실천으로 여겼지만 가족들은 반대했다. 더욱이 개신교 목사였던 조부에 이어 시골에서 개척교회 목사의 길을 걷는 아버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터이다.
고흐는 열여섯 살에 고향을 떠난 후 헤이그에서부터 화랑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회사는 프랑스와 영국에도 지점을 두고 있어 그곳에서도 그림을 파는 세일즈 활동을 하게 되지만, 종교와 독서에 심취하면서 자본주의 시장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직장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 후 목회자가 되려고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극복하지 못하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를 정신병원에 수용시키려고까지 한다. 결국 고흐는 시엥과 작별을 하고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동부지역의 황량한 드레덴으로 들어가 한동안 자연 속에서 인내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반고흐’ 하면 먼저 동생의 후원으로 팔리지 않는 그림만 그리다 떠난 화가, 성병에 걸렸던 화가, 자신의 귀를 자른 이상한 사람으로만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길지 않은 38년의 삶이었지만 그가 세상 속에서 몸부림치던 숱한 사연들과 그 과정은 모르고 특별한 사건만을 기억하면서 갖게 된 오판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에게는 종교의 실천주의적인 입장을 주장하며 남다른 휴머니즘을 발휘하는 지독한 인간애가 있었고, 자연주의 화풍을 만들어내기까지 숱한 방황과 혼란 그리고 몸으로 먼저 느끼는 화가정신이 있었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점에 근무하는 동안 자본주의 논리로 작가의 존엄성보다는 작품을 돈으로만 생각하는 귀족들을 경멸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 선택했던 광산촌에서 노동 착취의 실상을 눈으로 보았다. 이때 사회주의 의식이 싹텄고, 가난한 노동자들을 보살피는 일에 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또 화가의 길을 걷고자 브뤼셀 왕립 미술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지만, 아카데미적인 그림 그리기를 거부하고 독학을 택했다. 이 같은 혼란과 갈등이 그에게는 종교와 사회 그리고 미술에 대한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하는 자양분이 된다.

해바라기와 고흐
‘고흐’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해바라기’다. ‘노란색’은 그에게 희망이었고, 기쁨과 설렘을 반영하는 색이었다.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뜨거운 열정을 드러냈다는 평가다. 해바라기 작품들을 그리던 시기는 1888년 그가 남프랑스로 옮긴 이후부터 죽기 전까지의 시기로, 이곳에서 15개월 동안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가 있는 꽃병」을 포함해 2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이런 열정 속에는 동료 화가인 폴 고갱에 대한 기다림이 숨어 있었다. 고갱과 함께 작업을 하고자 작은 집을 마련하여 꾸미고 해바라기를 그렸다. 해바라기는 고갱을 향한 환영의 의미로 비춰진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친구로서 고갱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은 비극으로 끝난다. 고갱과 함께 보낸 시간은 불과 두어 달로, 고갱과의 불화를 겪으면서 자신의 귓불을 자른다. 그리고 고갱은 떠나고 만다.

보리밭, 밤하늘, 소외된 이들을 화폭에 담다
고흐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이자 야수주의 화가로, 지금까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다. 후대 평론가들은 그를 두고 보리밭과 평원을 사랑한 ‘들판의 아들’, 새벽과 황혼을 담은 ‘태양의 화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을 놓치지 않고 화폭에 새긴 ‘지성의 화가’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우리에게 알려진 몇몇 유명작품이 전부가 아니다. 유화 1,250점과 소묘 1,000점이라는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그가 본격적으로 붓을 든 시간이 불과 10여 년 안팎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에게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열정과 집중이 넘쳐났던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는 고흐의 작품을 두고 “보는 재능은 창조하는 재능보다 더욱 귀하다”고 말했다. 고흐는 자연만이 아니라 자연 속에 숨은 내면까지 들여다봤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혼을 표현하고자 했던 화가 렘브란트를 존경했던 만큼 고흐의 작품 속에서는 분명 그러한 특징들이 나타났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 열정을 화폭에 담아 넣은 고흐는 유난히도 보리밭과 별이 반짝이는 밤을 사랑했다. 「사이프러스가 있는 보리밭」,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 「사이프러스 과수원」, 「별이 빛나는 밤」,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 자연을 테마로 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유년시절 고향의 넓게 펼쳐진 보리밭 풍경과 시골 목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밤길의 추억이 그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그가 자살하기 전에 들판에서 그린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은 노란 보리밭 위를 날아서 멀리 떠나는 듯한 까마귀들의 모습이 마치 그가 세상과의 작별을 하게 될 것을 암시해주기도 한다. 인상주의와 야수주의 화가였던 만큼 자연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이나 자화상에서는 화려한 색상이 돋보인다. 이 같은 특징은 그의 작품활동 후기 시절에 많이 나타났다.
초기 작품 활동에서 고흐는 노동자와 농민 등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을 자주 그렸다. 그 시절 화풍은 어둡고 칙칙한 색조가 지배적이었다. 「어깨에 삽을 메고 있는 사람」을 비롯해 「광부들」, 「석탄 자루를 짊어진 광부들」 등은 광부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사회주의 의식에 심취했던 20대 중반 고흐의 열정과 보리나주 탄광촌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특히 초기 작품 중 걸작으로 남은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는 농민의 궁핍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사회적 고발 작품으로 알려진 「만종」과 「이삭줍기」를 남긴 밀레의 깊은 신앙심과 검소한 삶을 추종했던 고흐는 이 작품에서 농부들의 일상 중 저녁시간의 단면을 거친 손, 감자와 접시, 희미한 전등으로 표현하면서 노동으로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창수 전문기자

조회수 : 1,949기사작성일 : 20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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