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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발견
낭만의 도시 춘천

1990년대만 해도 경춘선 무궁화호는 엠티를 가거나 군대 가는 친구를 배웅하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2010년 복선전철이 완공되면서 이제는 지하철을 타고 당일치기로 너끈히 오갈 수 있지만, 춘천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설렌다. 오래전 추억들을 떠올리며 춘천으로 가을 마중을 나섰다.

확대보기소양강 처녀 동상

‘봄내’라는 한글 풀이처럼 풋풋한 ‘청춘’이 떠오르는 도시 춘천(春川). 하지만 도시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수계(水系)로 가장 살기좋은 곳은 대동강변의 평양이고, 둘째는 춘천의 소양강변이니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맥국 때부터”라고 한다. 삼국시대 이전의 부족국가 맥국(貊國)의 고도였던 이곳은 신라 선덕여왕 6년에는 군주를 두고 우수주(牛首州)라고 불렀다. 그러다 고려 태조 23년에 춘주(春州)라고 이름 지었다. 1888년 조선의 고종 25년에는 지금의 강원도청 자리에 비상시 조정이 피난하는 춘천이궁(春川離宮)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도청소재지가 되었고, 일본인들이 이주하면서 근대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다 조선총독부가 당시 철로가 놓인 철원으로 도청을 이전할 계획을 세우자, 춘천의 유지 12명이 1936년 사재를 털어 경춘철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도청소재지를 빼앗기면 지역 상권이 송두리째 무너질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4년 후인 1939년 서울 성동역에서 출발하는 경춘선 철도가 개통되었는데, 7년 만에 공사자금 전부를 회수할 수 있었을 정도로 수익률이 좋았다고 한다.

확대보기옛 춘천선과 ITX청춘열차옛 춘천선 / ITX청춘열차

확대보기춘천역 전경춘천역

한 많은 역사와 함께 울고 웃었던 경춘선
사설철도였던 경춘선은 광복 다음해인 1946년 미국에 의해 국유화되었고,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병력과 군수물자를 전방으로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1960년대 후반에는 강원도에서 훈련을 받은 파월장병들이 경춘선을 타고 서울을 거쳐 인천항에서 베트남으로 떠나기도 했다. 이후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엠티를 가는 대학생들이 경춘선 무궁화호에 우르르 몸을 실었다. 오래전 경춘선 입석표를 끊었던 또래라면 누구나 춘천과 관련된 추억 하나쯤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전망 좋은 2층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향하는 길, 가수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를 나직하게 흥얼거렸다. 열차와 철로는 바뀌었어도 춘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 특히 이맘때는 시원한 강바람 맞으며 자전거를 타거나 한가롭게 걸어 다니기 안성맞춤이다. 춘천역 주변에 자전거대여소와 대형 마트가 있어 갑작스럽게 여행을 결정했더라도 손쉽게 자전거와 함께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있다.
춘천역을 나서서 가장 먼저 만나는 너른 공터는 예전에 미군기지였던 캠프 페이지(Camp Page)다. 6·25전쟁 때 큰 공을 세운 미군 페이지 중령을 추모하는 뜻에서 이름 지어진 이 기지는 1951년 군수품을 공급하는 비행장 활주로를 시작으로 2005년까지 춘천에 주둔했다. 미군기지가 철수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교통이 철저히 통제되었고, 그 때문에 춘천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오히려 더 번잡했다. 그래서인지 그 옛날에는 춘천 외곽에 있는 남이섬이나 청평사 등으로 나들이를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2010년 12월 경춘선 복선전철이 생겨나면서 춘천역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이 새롭게 주목받았다. 아직은 허허벌판이지만, 캠프 페이지의 물탱크를 이용한 꿈자람 물정원을 비롯한 문화시설이 하나둘씩 들어설 예정이다.

확대보기소양강 스카이워크 전경소양강 스카이워크

6·25전쟁을 거치고 근대사회로
춘천역에서 불과 500m 거리에 위치한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은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의 한 조각을 꺼내 보인다. 춘천대첩은 인천상륙작전, 낙동강전투와 함께 6·25전쟁의 3대 전승 전투로 꼽힌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서울과 수원을 점령해 수도권을 포위하려고 했지만, 동부전선을 뚫고 춘천을 지나려던 북한군 2군단의 움직임이 급격히 느려지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춘천역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6사단 7연대와 경찰, 공무원, 학도병, 춘천시민이 힘을 합쳐 북한군의 남하를 사흘간 저지시켰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에 파죽지세였던 북한군의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 사이 국군은 방어선을 재정비하며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00년 6월 26일 중도 주민선착장 주변에 평화공원을 개장하였다. 잠시 자전거에서 옛 모습을 재현한 동상을 둘러보며 추모의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나루터를 끼고 강가를 따라 1㎞ 정도 더 달려 요즘 춘천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소양강 스카이워크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스카이워크 중 하나로, 바닥이 강화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미끄럼 방지를 위해 신발 위에 덧신을 신어야 입장할 수 있다. 입장료는 2,000원이지만 ‘춘천사랑상품권’으로 되돌려주기 때문에 관람을 마치고 주변의 식음료점에서 바로 사용이 가능하다. 스카이워크 앞쪽에는 폐 교각을 활용한 물고기 모양의 조형물이 있는데, 그 아래 놓인 폐 교각은 1940년대 일제가 화천댐을 건설할 당시 건설자재 운반을 위해 만든 다리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스카이워크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춘천의 새로운 랜드마크인 소양2교와 커다란 동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근대화에 발맞춰 1967년 의암댐이 건설되었고, 잇따라 1973년 소양강댐이 만들어지면서 호반의 도시가 된 춘천은 이제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내 순정’을 울부짖는 ‘소양강 처녀’가 도시를 상징하게 되었음을 실감했다(실제로 노래는 1969년 작곡되어 1970년 발표되었다).
강바람을 실컷 쐰 후에 향한 곳은 2018년 7월에 완공한 춘천시청. 새로 지은 건물이기에 그 안이 궁금하긴 하지만, 아날로그 여행자의 구미를 당기는 것은 신청사 뒤편에 있는 ‘춘천 강원도지사 구 관사’(옛 춘천문화원)이다. V자 모양 기둥이 독특한 2층 높이의 이 건물은 1959년에 준공되었는데, 특색 있는 건축 양식으로 인해 문화재청이 2004년 ‘근대문화유산 제107호’로 지정했다. 철제 옥상 난간과 반원형 벽면, 비대칭적인 공간 구성 등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근대 건축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

확대보기죽림동 성당과 상상마당 내부죽림동 성당 / 상상마당

확대보기디자인 스퀘어 외관디자인 스퀘어

지친 삶에 위안을 주는 아날로그 감성
춘천시청을 나와 중앙로를 따라 500m 정도를 달리면 춘천명동 닭갈비 골목 표지판이 보인다. 누가 뭐래도 춘천의 제일 먹거리는 닭갈비와 막국수. 그러나 ‘낭만시장’이라는 이름에 홀려 페달을 조금 더 밟았다. 6·25전쟁 당시 미군부대 물건들을 거래하면서 생겨난 춘천중앙시장이 현대적인 설비를 갖추고 2010년 이름을 바꾼 것. 미군이 입던 군복이나 군화, 미제초콜릿과 과자, 커피와 설탕, 전자제품 등을 거래하던 소위 ‘양키시장’이 아직도 곳곳에 있다. 매일 오후 5시부터 30분간 상인들이 직접 ‘낭만FM’을 운영하는 것도 이색적이다.
일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다름 아닌 국수. 길 건너편 육림고개에는 오래된 카센터를 개조해 만든 파스타집 ‘가라지(Garage)’와 외국인 요리경연대회에서 수상을 한 베트남 주인장이 쌀국수를 내어주는 ‘퍼후에(Phở Huệ)’, 넉넉한 인심을 맛볼 수 있는 낭만국시가 그 주인공이다. 국수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난 뒤 약사고개를 넘어 죽림동성당을 향했다. 6·25전쟁 당시 아픈 이를 돌보고 식량과 옷을 나눠줘 ‘성당병원’, ‘수녀병원’으로 불리기도 한 이곳은 2003년 등록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언덕을 오르면 푸른 잔디와 나무 사이로 단아한 분위기의 석조성당이 나타나는데, 이국적인 분위기는 물론 춘천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권이 일품이다.
이번 나들이의 마지막 장소는 2014년에 개관한 KT&G 상상마당 춘천이다. 죽림동성당에서 약 3㎞ 떨어져 있어 자전거를 타고 10분 정도면 도착한다. ‘공간’ 사옥과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를 설계한 한국 건축의 거장 고(故) 김수근의 작품으로, 붉은 벽돌의 절제된 외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애초에는 춘천 어린이회관으로 1980년에 문을 열었는데, 오랜 재정적자 끝에 10여 년 동안 방치되다가 KT&G가 인수해 기존 형태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리모델링했다. 감각적인 디자인 제품을 만나볼 수 있는 아트숍 ‘디자인 스퀘어’와 야외공연장, 갤러리와 라이브 스튜디오, 강의실과 카페, 숙박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자전거를 주차하고 가장 먼저 향한곳은 뒷마당. 2,000석의 야외음악당이 있는데, 나비가 살포시 날개를 펼친 것처럼 음악당을 중앙에 두고 건물이 부채꼴로 펼쳐져 있다. 이제는 내부를 둘러볼 차례다. 1층과 2층이 하나로 트여 있으면서도 긴 경사 계단으로 층이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지는 독특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건축적으로 계산된 경사면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걸음마다 달라지는 공간의 느낌을 눈으로 자연스레 확인하게 된다. 테라스에 앉아 의암호를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춘천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글·사진 이계선 객원기자

조회수 : 1,922기사작성일 : 20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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