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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남한강 따라 여주 한 바퀴

 

흔히 ‘여주’ 하면 도자기나 쌀밥, 아울렛을 먼저 떠올리지만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이곳은 봄나들이 나서기에 제격이다.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도가 만나는 지점이라 지리적으로 사통팔달의 위치에 있고, 남한강을 따라 곳곳에 볼거리와 이야기가 보석처럼 숨어 있다.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남한강을 따라 떠나는 여주 한 바퀴.

시간을 보듬으며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따뜻한 볕을 품고 경기도 여주를 관통하는 강의 이름은 여강(驪江). 금강이 부여를 지나면서 백마강이 되듯, 옛 사람들은 남한강의 물길 중 여주를 휘감아 도는 약 40㎞ 구간을 따로 이름 붙였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조차 이곳에서는 한결 부드러워진다. 정식 명칭은 남한강이지만 왠지 ‘여강’이라는 이름이 더 정겹다. 골내근현(骨乃斤縣)이라 불리던 여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이었다가 삼국이 성립되면서 처음에는 백제, 나중에는 고구려가 차지했다. 이후 신라에 편입되었고,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 예종 원년(1469년)에 지명을 여주(驪州)로 정했다. 임자가 여럿 바뀌었지만 아름다운 풍광만은 변치 않아 예로부터 많은 묵객(墨客)들을 불러들였다. 굽이굽이 옛 이야기가 흐르는 여주, 강줄기를 따라 가장 먼저 신륵사(神勒寺)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변의 아름다운 절집 신륵사
이 땅의 아름다운 절집을 꼽으라면 신륵사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강가에 위치한 절로, 옛날 사람들은 ‘벽절’이라고도 불렀다. 약 1,300년 전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지었다고 하나 문헌에 남은 것이 없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또한 고려 우왕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사나운 용마(龍馬)를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 하여 신륵사라 이름 지었다는 설도 있다. 유래가 어떻든 조촐하면서도 우아한 절집과 그 앞을 흐르는 강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런 까닭에 세종대왕의 영릉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부터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신륵사는 대부분의 사찰과 달리 절 중앙부에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있다. 참고로 법당의 이름은 주불(主佛)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가장 흔히 보는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대적광전(大寂光殿) 혹은 비로전은 우주 진리를 밝히는 비로자나불을, 극락전 혹은 무량수전은 극락을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신다. 신륵사처럼 극락전을 중심 법당으로 삼으면 보배 보(寶)를 더해 극락보전이라고 한다.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 신륵사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타서, 부석사의 무량수전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돌탑만큼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뽐낸다.
경내를 둘러보고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강변에 지어진 다층전탑이다. 고려시대 전탑 중 유일하게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벽돌탑으로, 보물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탑의 모양이 마치 커다란 굴뚝처럼 보이는데, 오래전에는 남한강을 오가는 배들의 등대 역할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이밖에도 신륵사에는 극락보전 앞에 위치한 보물 제225호 다층석탑을 비롯해 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31호 석등 등 여러 유물이 남아 있다.
다층전탑 아래 바윗돌에 세워진 정자 강월헌(江月軒)은 신륵사에서 가장 뛰어난 절경을 간직한 곳으로, 6각형 정자 사이로 보이는 모든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처럼 뱃놀이 풍류를 즐기고 싶다면 황포돛배를 타보자. 신륵사 앞의 조포나루는 서울 마포나루, 광나루, 이포나루와 함께 한강 4대 나루로 불렸다. 그 옛날 운항하던 돛배를 재현한 것으로, 이제는 여주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같은 듯 다른 두 임금의 무덤 영릉
다음으로 향하는 곳은 영릉이다. 요즘처럼 세상이 하수상할 때면 선조들에게서 지혜를 구하고 싶어진다. 모르는 이들이 많지만, 여주에는 조선시대의 두 임금이 잠들어 있다. 가장 위대했던 왕으로 평가받는 세종과 병자호란을 겪고 왕이 된 효종, 두 삶처럼 능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다.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은 조선시대 왕릉 중 최초로 왕과 왕비가 함께 합장한 무덤으로, 세종대왕의 왼편에 소헌왕후가 잠들어 있다. 원래는 대모산(大母山) 기슭에 있던 것을 예종(睿宗 : 1468∼1469 재위) 때 옮겨왔다. 매표소를 지나면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세종관이 가장 먼저 사람들을 맞이한다. 해시계, 자격루, 측우기 등 당대의 과학기구와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세종이 남긴 다방면의 놀라운 업적을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다.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왕릉으로 향하는 금천교가 나타난다. 속세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건너가는 상징물로, 궁궐 입구에도 놓인다. 다리를 건너면 나쁜 액운을 막는 홍살문이 나타나고, 그 뒤편으로 제사를 지낼때 사용하는 정자각(丁字閣)이 보인다. 정자각을 향해 반듯하게 놓인 돌길을 신도(神道)라고 하는데, 죽은 임금의 혼령만 다니는 신성한 길이므로 피한다. 궁궐이나 왕릉에서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하여 동쪽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나오고, 중앙으로는 다니지 않는 것이 예법이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왕릉을 관리하거나 제물을 준비하는 이들이 지내던 수복방(守僕房)이, 서쪽에는 제사음식을 준비하던 수라간(水刺間)이 있다. 세종대왕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돌계단을 이용해 봉분 바로 앞까지 갈 수 있다. 특별히 양쪽에 돌계단을 만들어 성군(聖君)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도록 한 것. 봉분에 큰절을 하고 뒤로 돌아서서 아래를 바라봤다. 시야가 훤하니 막힘이 없고, 내리쬐는 햇볕 또한 따사롭다.
세종대왕릉에서 내려와 ‘왕의 숲길’이라는 오솔길을 넘어가면 효종대왕릉으로 연결된다. 작은 산을 하나 넘어가는 정도로, 1㎞가 채 안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영조와 정조도 이 길을 이용해 두 임금을 참배하였다고 한다. 효종대왕의 영릉(寧陵)은 조선시대 최초로 위, 아래로 배치된 쌍릉 형태이지만, 봉분까지 오르는 길이 없어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상평통보를 발행하고 대동법을 실행한 효종. 그는 어린 시절에 청나라 볼모로 잡혀갔던 원한을 갚기 위해 북벌을 계획했다. 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즉위 10년 만에 눈을 감았다. 재실 마당에는 수백 년 된 회양목과 향나무가 효종의 넋을 안타깝게 위로하며 서 있다.

 

아득한 세월을 견뎌낸 웅대한 힘 파사성
답답한 마음을 안고 천서리에 위치한 파사성에 오른다. 해발 250m의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돌을 쌓아올려 만든 것으로, 신라시대 제5대 임금인 파사왕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고대 파사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던 터라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파사성을 발굴 조사했더니, 부족국가시대에서 발견되는 무늬 없는 토기가 나오기도 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선조 25년인 1592년에 임진왜란 때 유성룡의 주장에 따라 3년 동안 성곽을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유성룡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파사성 위에는 풀이 더부룩하고(婆娑城上草芊芊), 파사성 아래에는 물이 빙 둘렀네(婆娑城下水縈廻). 봄바람은 날마다 끊임없이 불어오고(春風日日吹不斷), 지는 꽃잎 무수히 성 모퉁이에 날리네(春風日日吹不斷).”
아마도 공사가 완공된 때가 지금처럼 봄바람이 살랑일 무렵이었던 모양이다.
주차장에서 성의 정상까지는 약 900m, 제법 가파르지만 쉬엄쉬엄 오르면 20분 정도 걸린다. 평소 운동을 게을리했더니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힌다. 입구에는 무너진 성벽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중턱부터 복원된 성곽이 잘 닦인 길처럼 넓게 펼쳐져 있는데, 둘레는 약 1,800m로 비교적 오래된 성벽이 많이 남아 있어 운치 있다. 이 길을 따라 10분 정도 서쪽을 향해 걸으면 5m 높이의 바위에 새긴 마애불이 나타난다.
무엇보다 파사성이 매력적인 이유는 남한강 상하류를 한눈에 훤히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접할 수 없는 파노라마가 사방으로 펼쳐진다. 한 나무에서 두 줄기가 자란 ‘연인소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4대강 사업으로 생긴 이포보(梨浦洑)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더 큰 세상을 향해 눈을 부러 멀리 둔다. 사람살이는 여전히 혼란스러운데, 발 아래 펼쳐진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하다. 줄잡아 2,000년의 아득한 세월을 견뎌낸 성벽의 우직함이 기특할 뿐이다.

추천! 여주의 나들이 코스
감고당
인현왕후의 개인 저택으로, 명성황후가 8살에 이사하여 왕비 간택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영조가 감고당이라 명하였으며, 처음에는 안국동에 있다가 1966년에 쌍문동으로 이전하였고, 2004년에 여주군에서 인수하여 2008년에 중건을 완료하였다.
도자세상
여주는 도자기의 고장이다. 2011년 4월, 신륵사 입구에 도자기 쇼핑몰 겸 전시관, 체험관 등을 겸한 다목적 공간이 문을 열었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핸드메이드 공예, 로컬 푸드, 벼룩시장, 공연 등 볼거리가 풍부한 리버마켓이 열린다.
쌀밥정식
예로부터 여주는 물이 좋고 토질이 좋아 쌀농사를 많이 지었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농경도시 중 하나로, 5일과 10일마다 여주5일장이 열린다. 구경을 마친 후에는 여주쌀밥으로 주린 배를 채우자. 돌솥밥을 기본으로 20여 가지에 달하는 반찬이 한 상 푸짐하게 차려진다.

글·사진 이계선 객원기자​

조회수 : 1,602기사작성일 : 2017-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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