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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로망
한적한 여름날 평택

본격적인 휴가철이지만 막상 떠나려고 보면 어딘지 모르게 망설여진다. 알 만한 여행지는 이미 만원사례. 진정한 휴식을 누리기도 전에 먼저 지쳐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국제무역항과 미군공군기지가 들어선 도농복합도시 평택은 이국적이면서도 활기찬 분위기로 이방인을 유혹한다.

호랑이 모습의 한반도, 그 중심의 배꼽 자리에 해당하는 경기도 평택(平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남북으로 통하는 큰길’로 예로부터 사신의 행차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서해로 바닷길이 열린 이곳은 ‘평지의 연못’이라는 그 이름처럼 1930년까지만 해도 기름진 평야와 큰 연못, 넓은 습지가 펼쳐 있었다. 오래전부터 농사를 해온 이들은 들에서, 고기잡이를 해온 이들은 뱃머리에서 풍요를 바라며 노래를 불렀다.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버티는 대신 주거니 받거니 흥겨운 가락을 이어간 것.
하지만 6·25전쟁과 1947년의 대홍수는 이곳 사람들의 삶을 확 바꿨다. 안타깝게도 원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1950년대에 의도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들어서면서 바닷물이 끊겼고, 포구와 나루는 줄어들었다. 산업화와 현대화로 농업인구마저 줄어들면서 사람들의 돌림노래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대신 1986년 무역항이 열렸고, 그 일대는 기계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로부터 10년 후, 주민투표를 거쳐 평택군과 송탄시, 평택시가 통합되면서 성장잠재력은 더욱 커졌다. 2000년 서해대교 개통으로 해로와 철로, 고속도로를 이용해 편리하게 갈 수 있는 그야말로 사통팔달 서해안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했다.

확대보기평택허브팜의 정원과 입구에 있는 농부카페이국적이면서도 로맨틱한 평택허브팜의 정원. 입구에 있는 농부카페를 이용하면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자연이 주는 편안한 휴식, 평택 허브팜
최근에는 주한미군기지 이전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이 들어서는 고덕국제신도시 때문에 나라 안팎으로 평택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들썩이는 이곳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더니 누군가 고개를 갸웃하며 “아파트나 땅을 사러 가냐”고 물었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평택은 휴가철 교통정체는 물론 인파를 피해 조용하게 휴식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통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수도권 전철과 광역버스로도 갈 수 있다. 더 빠르게 가고 싶다면 고속철도를 이용하면 된다. 수서에서 출발하는 SRT를 타면 30분 만에 지제역에 도착한다. 평택항 인근에 호텔도 여럿 있는데, 성수기임에도 저렴한 가격에 호캉스를 누릴 수 있다.
도농복합도시로 녹색체험마을까지 다채로우니 여름휴가를 떠나기에 이만한 도시가 또 있을까? 평택허브팜은 이런 생각을 확신으로 바꿔준 곳. 큰길가 아파트단지 옆에 있어 무심결에 지나치기 쉬운데, 들어서자마자 예상보다 큰 규모에 놀란다. 원예를 전공해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주인장이 손수 가꾸는 이곳은 테마별 정원을 산책하고, 아름드리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즐기며, 다양한 체험학습을 하는 자연주의 교육농장이다. 사람들이 농업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고 편안하게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게 목표란다.
때마침 방문했을 때는 외국의 풍경사진으로만 만나던 라벤더 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안내판에 적혀진 ‘꿀벌 작업 중’이라는 유머러스한 글귀처럼 보라색 물결 사이를 노란 꿀벌이 부지런히 날아다닌다. 라벤더 꽃이 지고 나면 장미와 백합이 꽃대궐을 이룰 차례. 이국적이면서도 로맨틱한 정원 한쪽에는 아로니아와 블루베리, 자두가 영글어간다. 싱싱한 채소와 각종 허브도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한창이다.
여기서 자라나는 각종 농산물은 다양한 체험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정성껏 가꾼 작물에 상처를 내는 일이 없도록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허니버터 감자칩이나 허브 타르트, 피자 만들기 같은 쿠킹 체험은 편식하는 아이들도 금세 접시를 비우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토피어리 만들기와 미니 온실 만들기 같은 어린이 정원사 체험은 물론이고 전문적인 원예교육까지 맞춤형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최근에 문을 연 농부카페에서는 직접 재배한 농산물과 평택지역에서 생산한 재료를 활용해 각종 디저트와 음료를 만드는데, 생김새는 물론 맛도 훌륭하다.

확대보기서해대교의 야경과 마린타워 14층 전망대웅장한 서해대교와 붉은 노을이 멋진 야경을 선사한다. 평택항 홍보관과 마린타워 14층 전망대가 조망 포인트

낮보다 밤이 더 눈부신 평택항
밤이 짧은 탓인지 이상하게도 여름에는 더 오래 놀고, 먹고, 마시고 싶다. 그런 까닭에 어떤 도시는 밤의 풍경으로 오롯이 남는다. 평택의 밤이 딱 그렇다. 낮보다 눈부시고 뜨겁다. 특히 평택항에서 바라보는 서해대교 야경이 으뜸이다. 아산만을 가로지르는 서해대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선정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 경치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크기로도 유명한데, 주탑의 높이가 무려 182m, 총 길이는 7.3㎞에 이른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발아래 두고 달리다 보면 무더위가 저만치 날아가는 것만 같다. 해질 무렵에는 바다 위에 구름다리처럼 웅장하게 펼쳐진 서해대교와 붉은 노을이 멋진 경관을 연출하는데, 허풍을 조금 치자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인 금문교(Golden Gate Bridge) 못지않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라면 평택항 홍보관에 들러보자. 동북아의 물류 중심인 평택항을 일반인에게 소개하는 전시시설인 동시에 평택항 전경을 감상하기 좋은 포인트다. 1층에서는 평택항 입항에서 출항까지의 시뮬레이션 체험을 할 수 있으며, 2층은 해양 개척사와 등대 및 항만 이야기를 소재로 구성해놓았다. 실제로 크레인을 작동시켜 모형 컨테이너 박스를 이동시키는 항만체험존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3층과 4층 야외는 탁 트인 전망대다. 중국으로 가는 커다란 페리가 도착하면 사람과 화물이 분주하게 실리는 것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서해대교 아래에는 컨테이너 수송 차량과 화물차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저 멀리에는 선적을 기다리는 자동차들도 보인다. 다른 도시에서는 손쉽게 만날 수 없는 이색풍경이다.
지난 30년 동안 평택항은 그야말로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중국 룽청과 389㎞, 다롄 537㎞, 칭다오 630㎞, 텐진과는 870㎞ 거리로, 현재 평택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는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5개의 국제카페리가 운항되고 있다. 2020년에는 크루즈선 입항이 가능한 국제여객부두가 완공될 예정이다.
평택항 마린센터 14층에 위치한 전망대와 바로 위층 스카이라운지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이미 입소문이 난 곳이다. 서울 남산처럼 2시간 동안 360도 회전하는데, 대략 코스 요리를 먹는 시간과 비슷하다. 그래서 창가 자리는 언제나 예약순위 1위를 자랑한다. 파스타와 런치 메뉴가 1만5,000원이며, 스페셜 코스 요리도 6만 원을 넘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다.

확대보기평택국제중앙시장6·25전쟁 때 생겨난 평택국제중앙시장은 오랜 세월만큼 켜켜이 쌓여온 이색적인 문화가 굳게 뿌리내렸다.

다문화가 공존하는 평택국제중앙시장
‘경기도의 이태원’이라 불리는 평택국제중앙시장도 빼놓을 수 없다. 6·25전쟁으로 1952년 미군공군기지가 평택에 들어서면서 부대를 끼고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된 것으로, 원래는 송탄저녁시장이라 불렸으나 송탄시와 평택시가 통합되면서 2012년부터 지금의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걸린 거리에는 일반적인 전통시장과 달리 환전소와 밀리터리 의상점, 미군들이 즐겨 가는 클럽 등 수백여 개의 다양한 가게가 몰려 있다. 휴식을 즐기는 외국인들과 영어 간판이 즐비한 골목을 걷노라면 마치 외국 쇼핑단지에 온 느낌이 든다. 운이 좋으면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소품과 패션 아이템을 단돈 5달러에 구매할 수 있다.
국제시장이라는 이름답게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힘든 아프리카, 페루, 터키, 멕시코, 인도 등의 낯선 음식들을 파는 식당도 즐비하다. 무려 32개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데, 기웃거리며 메뉴 구경을 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미군부대 근처답게 소시지와 치즈를 듬뿍 넣은 부대찌개도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별미는 미국인들의 소울 푸드인 햄버거다. 하지만 일반적인 미국식 햄버거를 상상하는 것은 금물. 두툼한 빵 사이에 고기 패티와 치즈, 수북이 올라간 양배추, 계란프라이가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재밌는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미스리, 미스진처럼 유독 가게 이름에 사람의 성을 붙였는데, 이는 외국인들이 부르기 쉽게 작명한 나름의 센스라고 한다.
요즘 가장 핫한 곳은 시장 외곽에 있는 길이 300m 정도의 기찻길이다. 송탄역에서 미군부대 안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원래 미군부대로 물품을 수송하는 통로였다. 아기자기한 벽화로 꾸며진 이 길을 따라 지금도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미군부대에서 필요한 물자를 실어 나른다. 평소에는 보도로 개방하며, 2012년부터 지금까지 주말마다 헬로 나이트마켓(Hello Night Market)이 열리고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30분까지 장이 서는데, 철도를 따라 줄지어 선 20여 개의 분홍색 마차마다 특색 있는 물건을 판매한다. 지난 7년간 이곳에서 장사를 하다가 시장 안에 가게를 열어 나름 성공한 청년사업가들도 여러 명이다. 흥미진진한 천일야화처럼 다채로운 매력을 간직한 도시 평택. 낯설면서 친숙한 이곳에서 여름을 호젓하게 보내보시길.

덧붙이는 평택 이야기

확대보기웃다리문화촌, 평택호 관광단지웃다리문화촌 / 평택호 관광단지
웃다리문화촌
‘웃다리’는 평택지역의 농악을 일컫는 말. 폐교된 서탄초등학교 금각분교를 시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1950~1980년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전시와 더불어 동물 먹이 주기, 천연염색, 생활도예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평택호 관광단지
평택호 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겨난 인공호수로, 낚시명당으로 손꼽힌다. 단지 안에 한국소리터와 평택호예술관, 모래톱공원, 자동차극장이 있으며, 수상레저도 즐길 수 있다. 올해 여름에는 12구간의 빛 터널과 대형 조형물, 포토존을 설치해 한여름 밤의 불빛 축제를 연다.

글·사진 이계선 객원기자

조회수 : 1,918기사작성일 :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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