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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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뜨겁게
본능이 이끄는 대로
에스엔이노베이션 정영춘 대표

일반인들의 짧은 생각으론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목숨을 걸고 산 정상에 도전하는 이들이나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뻔히 알면서도 매번 레이스의 출발점에 서는 마라토너들. 그리고 실패의 처절함을 경험하고도 번번이 다시 일어서는 기업인들이 그렇다. 7전 8기가 비유나 과장이 아닌 정영춘 대표 같은 이들이다. 지난 1년간 재기 기업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힘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누군가에겐 오기, 또 누군가에겐 사명감이나 책임감이었다. 정 대표에게 그것은 본능이었다. 발명가의 끓어오르는 도전 본능이 시키는 대로 살아온 그는 부와 명예를 얻지 못했어도 행복하다고 했다.

확대보기정영춘 대표

어느 발명가의 마지막 도전

“위대한 발명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소에 항상 의문을 생활화하고, 그 의문을 끝까지 캐는 자세를 갖고 꾸준히 노력하면 앞으로 개인과 국가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발명가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확대보기정영춘 대표 1991년 제26회 발명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을 당시의 정영춘 대표
1991년 5월에 제작된 대한뉴스(제 1854호)의 오래된 영상 속에서 서른세 살 앳된 얼굴의 발명가 정영춘은 이렇게 말했다. 제26회 발명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은 그는 당시 25개의 발명 특허를 가진 청년 발명가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어색하게 읊은 수상소감이었지만, 정영춘 대표의 지난 인생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시 본 영상은 새삼스럽다.
정 대표는 딱 자신이 뱉은 말처럼 살아왔다. 돈만 생기면 실험기구를 사서 모으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창업과 폐업을 반복하며 발명가이자 경영자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에 걸쳐 ‘발명’이라는 키워드 하나를 품고 살아왔다. 실패의 순간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엔지니어로서의 집념이었다. 자신이 개발한 아이템으로 사업화에 성공해서 엔지니어의 표상이 될 수 있는 세계적인 기업을 키워보자는 꿈이었다.
여러 차례의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모터 장인’이란 별명을 얻은 정 대표가 산업용 실링팬을 들고 에스엔이노베이션을 창업한 것은 2014년. 그는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 될 거라고 했다. 몇 년 후에 매출을 얼마나 올리고, 세계 몇 위의 기업을 만들겠다는 얘기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개발한 고효율 스마트 SR(Switched Reluctance) 모터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줄일 수 있는지, 얼마나 조용하고 튼튼하며 안전한지, 기업과 근로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이점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얘기하며 눈을 반짝였다. 30년 전 영상 속의 젊은 청년 그대로였다.

세계적인 엔지니어 회사를 꿈꾸며 창업으로 직행

발명청년의 직장생활은 딱 일주일로 끝이 났다. 일주일 만에 답답한 조직생활이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대형 네온사인 점멸 제어장치를 아이템으로 스물일곱 살 어린 나이에 창업으로 직행했다. 서울 연희동 지하실에 사무실을 얻었다. 믿을 것은 트랜스포머 없이 고압을 제어해서 대형 네온사인을 점멸시키는 신기술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통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 정비를 위해 대대적으로 대형 네온사인 광고판을 만들 때였다. 대형 네온사인의 제어장치 기술을 찾아 헤매던 광고회사 담당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정 대표의 지하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 길로 정 대표는 바로 짐을 싸서 광고회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프로젝트 몇 개를 하고 났더니 집을 살 만큼 큰돈이 쥐어졌다. 그 돈으로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했다. 사업은 생각보다 쉬운 것처럼 보였다.
그 다음 얘기는 너무 뻔해서 놀랍지도 않다. 광고회사가 다른 회사를 불러들여 경쟁을 시켰고, 결국에는 기술을 탈취했다. 뒷돈, 술접대 요구…. ‘장사꾼도 아니고 이런 꼴 저런 꼴 보기 싫다’는 생각에 때려치웠다.
첫 창업에서부터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맛본 정 대표는 용역을 받아 기술을 개발해주는 R&D 엔지니어링 회사를 차렸다. 제조에 대한 부담 없이 연구개발에 전념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백열전구가 사용되던 당시에 그는 국내 최초로 형광등 밝기 조절장치를 개발했다. 이 기술에 관심을 보인 조명회사와 함께 탁상용 스탠드를 개발했고, 사업화가 잘 진행됐다. 그런데 돈이 벌리니 조명회사의 동업자들 사이가 틀어지면서 문제가 생겼고, 결국 폐업으로 결론이 났다. 이때 받지 못한 로열티가 1억5,000만 원이나 된다. 당시 서울시에서 아파트 한 채를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그 후 삼성전자 비상근 기술고문으로 신상품 기획팀에서 3년간 일하면서 고효율 BLDC 모터를 활용해 세탁기, 냉장고의 핵심 부품인 컴프레서를 개발했다. 고액의 기술자문료를 받았지만, 정 대표의 마음 한구석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다. 때마침 벤처 붐이 일던 1990년대 후반이었다.
“기술을 빼앗기고, 로열티를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국내 풍토에서는 한계가 느껴졌어요. 결국 내 아이템을 직접 제조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했죠.”

기술탈취, 부도, 투자사의 뒤통수까지 산전수전

30억 원의 큰돈을 투자받아 모닉스를 설립했다. BLDC 모터를 이용한 초절전 선풍기가 주력 아이템이었다. 팬 날개에 모터를 집어넣어 선풍기 뒷부분을 없애버린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1999년 양산을 시작해 일본에 수출도 했다.
정 대표는 마음이 급했다. 자신을 믿어준 투자자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1∼2년 안에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지만, 생각처럼 빨리 결과물이 나오지 않으니 조바심이 났다. 혁신적인 디자인이다 보니 금형에만 5억 원 이상 들어갔고, 초기에 불량을 잡는 데도 애를 먹었다. 투자금은 바닥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런데 선풍기가 잘 팔리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문제가 커졌다. 제품 생산을 위해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지만, 창업 후 3년이 지나니 은행에서 자금 상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제 제품을 만들어 팔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어서 더 화가 났어요. 운영자금이라는 장벽에 부딪힐 줄 누가 알았겠어요. 상환 기한은 왜 그렇게 빨리 도래하는지. 펑크가 나기 시작하니 이러다가 무리수를 두면 투자자들에게 더 큰 피해를 주겠다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접었어요. 10억 원만 있었어도 살아났을 거예요.”
정 대표는 한동안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몇 번의 실패에도 끄떡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던 그를 깊은 절망에 빠뜨린 것은 채무 독촉이나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자신의 신세가 아니라 실패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자책이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심한 정신적 충격에 기억상실 증세까지 보였던 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2년 만인 2003년. 그가 들고 온 것은 산업용 냉난방기를 위한 ECM(Electronically Commutated Motor) 모터였다. 100년 동안 사용되었던 유도전동기를 대체할 차세대 모터로, 당시 미국에서는 이미 냉난방 공조기의 표준 모터로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차츰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정 대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전시회를 찾았고, 거기에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발견한 것. 그는 어쩔 수 없는 엔지니어였다.
미국에 법인을 세우고 한국을 오가며 모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3년에 소문을 들은 지인들로부터 10억 원의 투자금을 모아 안양에 사무실을 냈다. 모닉스 시절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짠돌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자금을 아껴가며 기술 개발에 몰두했다. 기존 특허를 피해야 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지만, 미국 기업과 견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미국 특허까지 받았다.

확대보기SR 모터를 적용한 산업용 산업용 실링팬 / 정영춘 대표1_ SR 모터를 적용한 산업용 실링팬, 에너지 절감 효과가 뛰어날 뿐 아니라 소음이 적고 내구성이 뛰어난 혁신적인 제품이다.
2_ 발명가로 촉망받던 청년은 35년간 실패와 재기를 반복하며 어느덧 예순 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정 대표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7전8기, 여전히 나는 엔지니어다

특허까지 받았지만 후속 투자를 받는 일이 쉽지 않았다. IT 투자 붐이 일었던 당시 국내에서는 모터로 사업을 한다고 하면 굴뚝산업이라고 여겨 투자사들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소재한 VC가 투자를 결정하면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투자금 집행이 유연하지 못한 국내 VC와 달리 당장 버틸 수 있도록 130만 달러의 자금을 수혈해줬다.
그런데 대책 없이 투자금을 받은 게 화근이 됐다. 투자금이 불어나면서 창업자인 정 대표의 지분은 점점 줄어들어 절반 이하가 됐다. 결국 투자사는 자신들이 뽑은 CEO를 선임했고, 정 대표는 공동대표로, 그리고 결국에는 CTO로 밀려났다. 화성에 공장을 짓겠다는 정 대표의 의견은 묵살당했고, 그동안 동고동락하며 기술을 개발했던 엔지니어들이 쫓겨나고 투자사가 뽑은 인력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방만한 경영이 계속되면서 2006년에 90억 원까지 매출을 올렸던 회사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2013년부터는 회사가 침몰하는 게 정 대표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2013년 10월, 창업 10년 만에 정 대표는 CTO직에서 사임했다. 미국 투자사에 놀아난 것도 억울했지만, 그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이후 미국의 유명 모터 회사가 해당 아이템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투자를 받으면서 특허권까지 미국 회사에 넘어갔던 것이다.
“내가 낳은 아이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고 있어요.(웃음) 지금이야 웃고 얘기하지만, 사임을 결정하고 석 달 동안은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만큼 충격이 컸어요.”
그의 발명 능력과 기술력이 업계에 정평이 나 있던 덕분에 고액 연봉의 기술자문을 제안하는 곳도 있었다. 편하게 기술료 챙기며 말년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는 다시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그로서는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SR 모터라는 신기술을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소음과 진동 때문에 상용화가 어려웠던 SR 모터를 정부과제로 1년 만에 개발해 상용화에 성공했고, 산업현장의 실링팬에 도입해 필드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올해는 SRT 수서역사 내에 설치하는 쾌거도 이뤘고, 작년부터 인도네시아 수출도 시작됐다.
“마지막 농사 한번 지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새로운 기술이 보이는 걸 어떡해요. 운명인가보다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사냥감을 보면 맹수들이 본능적으로 달려들듯이 저의 어떤 본능이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해요. 남은 인생을 그냥 소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35년간 기업을 운영하면서 쓰라림과 아픔도 있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했으니 행복해요. 가다가 또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도전하고 싶어요.”

임숙경 기자, 사진 김윤해 기자

조회수 : 1,244기사작성일 : 20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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