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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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영人
누구에게나 위기는 기회 단, 얼리버드가 잡을 뿐이다!
㈜에스케이텍스 정현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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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케이텍스 정현분 대표의 프로필을 요약하면 이렇다. 매일 4시면 자동으로 기상한다. 부지런한 부모님 영향 덕분에. 1년 중 3분의 1은 해외에 체류한다. 수출로 먹고사는 기업이니까. 매일 5~6가지 신제품은 개발한다. 섬유기업으로 살아남기 위해. 돌이켜보면 학연, 지연, 혈연, 하물며 성별까지 뭐 하나 유리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비장의 무기가 있다면, 아마도 그건 부지런함이고 긍정의 힘일 것이다. 폴리에스테르 섬유, 이른바 물실크 원단으로 연매출 120억 원을 달성하는 지금의 에스케이텍스가 될 수 있었던 비결에도 웬만해선 따라갈 수 없는 그의 근성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준비된 자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그의 주장이 너무 뻔한 이야기가 아닌, 매우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부지런을 대물림해준 부모님께 감사한다
확대보기‘운이 좋았다’고 했다. ㈜에스케이텍스의 정현분 대표가 지난날을 떠올리며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다. 1965년 경북 영천 농가에서 태어난 2남3녀의 셋째 딸. 그것도 남아선호사상이 당연시되던 그 시절에 태어난 그가, 운이 좋단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사연은 이렇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기침하는 정 대표의 아버지와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밥을 짓는 어머니는 마을에서 제일 부지런한 부부.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란 덕분에 부지런함이 몸에 배었으니 운이 좋은 거란다. 또 중학교 시절 배구선수로 뛸 만큼 타고난 강철체력도 부모님께 물려받았으니, 이 또한 운이 좋단다. 게다가 공부 잘했다고 명문 여상까지 진학하도록 허락했으니, 이 역시 부모 복이 있는 증거란다. 천성이 긍정적인 그이기에 할 수 있는 해석이다.
“당시 명문 여상에 간다는 건, 저 같은 딸들에겐 최고의 학벌이죠. 대구경북 지역 3대 명문 여상 중 하나인 경북여상에 입학했으니까요. 물론 전교 3등으로 입학해, 뒤에서 3등으로 졸업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딸로 태어난 제 또래 친구들에 비해 운이 좋은 거 아닐까요. 하하.”
유쾌하고 낙천적인 정 대표의 성격은 학창시절부터 도드라졌지만 여상 진학의 부작용도 따랐다. 주산·부기같은 학과공부는 그다지 적성에 맞지 않았고, 그래서 여상 출신들의 출세 코스(?)인 은행이나 대기업 취업은 남의 일이 됐단다.
그래도 다행인 건 섬유산업이 호황이던 그 시절, 섬유기계부품 제조업체에 어렵지 않게 취업한 것. 막상 일을 시작하니 의외로 일을 배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경리사원으로 입사했지만, 어느새 기술영업까지 척척 해내는 영업의 달인이자 회사의 팔방미인이 되더란다. 그러다 종업원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직접 사업에 뛰어든 건 1995년. 외환위기를 2년여 앞둔 그 시절, 대구 섬유업계는 이미 줄도산이 시작됐단다.
“그 시기, 섬유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헐값에 내놔도 사가지 않는 섬유기계가 수도 없었어요. 근데 멀쩡한 기계를 돌리지도 않고 고철로 버리자니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팔아보자 싶어 무역업을 시작하게 된 거죠. 그게 누군가에겐 기회가 된 겁니다.”

확대보기㈜에스케이텍스는 2014, 2015년 대한민국섬유소재 품질대상을 비롯해, 2015년 섬유의 날 산업자원부장관 표창을 수여한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섬유제조 전문기업이다.

첫 바이어 샤킬 영원히 잊지 못한다
확대보기 창업 이후 꾸준히 하루에 5~6종의 신제품을 개발한다는 정현분 대표는 이를 위해 현장 중심의 소통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산하고 시작한 무역업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운이 따랐다. 말이 ‘운’이지, 그동안 섬유업계에 종사하며 베테랑이 된 그를 믿고 따라주며 인맥 네트워크가 뒤를 받쳐준 덕분이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부품 거래를 위해 만났던 대구 섬유업계 협력사와 그 관계자들, 그리고 서울의 로컬 수출업체, 또 그런 거래처를 오가며 안면을 튼 섬유 수입 바이어들까지. 정 대표가 발로 뛰어 일궈낸 인맥을 따져보니 족히 수백 명이 되더란다.
“당시 무역업자들이 중고 기계를 팔고 나서 A/S를 책임지지 않아서 바이어들의 원성이 높았어요. 그게 또 저에겐 기회가 되었죠. 믿을 만한 수출업자를 찾아서, 바이어들이 수소문 끝에 저를 찾아오기 시작한 거죠. 제가 섬유기계부품 제조업체 출신이기도 하고, 또 납품 약속 만큼은 철저하게 지킨다는 소문을 들은 겁니다. 그런 바이어들 중에 파키스탄의 샤킬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샤킬은 파키스탄 섬유업연합회 회장이었고, 그런 그에게 약속대로 기계를 납품하고 부품조달을 말끔히 해결해주자 생각하지 못한 기회가 왔다. 파키스탄의 큰 손 바이어였던 샤킬의 추천으로 2차, 3차 파키스탄 거래가 성사되고, 나중엔 파키스탄 독점 수출권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니 정 대표에게 샤킬은 영원히 잊지 못할 첫 고객이다.
덕분에 정 대표의 무역업도 이후 4년 동안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수출에 탄력이 붙나 싶던 2000년대 초, 또다시 섬유기계무역업에도 불황이 찾아왔다. 정 대표도 이때 타이밍을 놓쳐 팔지 못한 5억 원대 섬유직기를 떠안게 되었단다.
“그 비싼 기계를 그냥 고철이 되게 할 순 없었죠. 고민, 고민하다가, 기왕에 그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내가 직접 이 기계를 돌려보자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참, 겁 없이 섬유제조업에 뛰어들게 된 겁니다. 따져보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그래도 ‘Sun of Korea Textile’, 즉 한국의 섬유로 최고기업(태양)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을 짓고 제조업을 시작하게 됐죠.”
2000년 6월 15일 폴리에스테르 섬유, 이른바 물실크를 제조하는 에스케이텍스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2001년 7월 15일을 기점으로 법인으로 전환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물실크 품질을 만들기 위해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여의 연구개발이 빛을 보기 직전, 영원한 긍정주의자인 정 대표마저 망연자실할 일이 벌어지고 만다. 2003년 추석 명절을 강타한 태풍 매미였다. 이때 에스케이텍스는 20억 원이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죠.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매미 피해 사례로 뉴스에 소개되면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도움의 손길이 곳곳에서 답지했어요. 당시 고건 총리가 현장점검 차 공장을 방문했는데, 그때부터 보험사와 은행의 발 빠른 지원이 이뤄졌고, 또 대구상의와 군부대, 자원봉사자까지 여러 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줬습니다.”

확대보기정현분 대표는 2001년 폴리에스테르 섬유를 생산하는 섬유제조 기업으로 에스케이텍스를 창업해, 현재 전체 매출의 90%를 수출로 달성하는 연매출 120억 원대 수출전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1,000만 달러 수출 뒤에 숨은 은인들 있었다
자원봉사자와 더불어 30여 명의 임직원이 하나 되어 피해복구에 매달렸다. 덕분에 3개월 만에 회사는 조기 정상화되면서 다시 방송에 피해복구 성공 사례로 소개됐다. 그야말로 가장 위태롭던 위기의 순간이 순식간에 전화위복의 기회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로컬 수출업체들로부터 물밀듯이 오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피해 이전의 3년 동안 단 한 번도 납기를 어긴 적이 없는 겁니다. 아마도 그런 평판이 매스컴 보도 이후 관련업계와 서울 로컬 수출업체에도 전해진 모양입니다. 그중에 복구 이후 첫 주문을 해준, 투세븐텍스타일 박영태 사장이 있었어요. 박 사장과는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거래를 하고 있고, 친분이 두텁죠. 당시 저희 물량의 80%를 주문해줬으니 정말 고마운 분이죠.”
그렇게 고마운 조력자들이 생기면서 에스케이텍스의 불행은 행운으로 바뀌었다. 복구 첫 해인 2004년에 40억 원까지 늘어난 매출은 그 이듬해에 70억, 2008년에 110억 원까지 늘었다. 하지만 2011년이 되자 섬유산업 경기가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세월호 이후 2012년 최악의 불황이 닥치면서 물실크의 최대 소비처인 아웃도어 시장이 붕괴 직전까지 몰린 것. 당시 로컬 수출업체로 제품을 전량 납품하던 에스케이텍스에게 이 같은 내수불황은 치명타였다. 더 이상 내수가 아닌, 수출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결심한 건 그 때문이었다.
“수출할 수 있는 방법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어요. 그러다 대구경제사절단으로 터키 이스탄불에도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때 만났던 터키 바이어들이 경주에서 개최된 국제섬유박람회에 다시 온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우리 제품을 소개해야겠다 싶어 적극적으로 우리 공장에 초청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10명의 터키 바이어를 공장으로 초청한 정 대표는 20여 년간 새벽마다 갈고닦았던 영어 실력과 더불어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매일 5~6건씩 신제품을 개발해 보유하게 된 2만여 종이나 되는 샘플을 보여주자, 터키 바이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공장에서 곧바로 컨테이너 하나 분량의 수출이 성사되었다. 에스케이텍스의 첫 직거래 수출의 시작이자, 에스케이텍스가 전체 매출의 90%를 직수출로 달성하는 기업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게 계기가 되어 천만불 수출탑도 수상하게 되었죠. 사실 저는 앉아서 결재만 하는 CEO가 아닙니다. 제 손을 본 사람들이 다들 고생 많이 한 손이라고 해요. 거짓말이 아니라, 사업을 시작한 이래로 하루에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또, 하루에 5~6가지 제품을 개발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며칠 저와 같이 일해본 사람들은 다 그래요. 왜 정현분이 이만큼 되었는지 알겠다고요. 하하.”
남들과 다른 ‘Something new’가 없으면 결코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정 대표. 그에게 근면과 성실은 분명 남과 다른 ‘섬싱 뉴’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일까. 천연실크가 아닌 물실크가 세상에 나왔을 때 세계 섬유시장의 판이 바뀌었듯, 에스케이텍스 정 대표만이 만들 수 있는 섬유, 그래서 ‘정현분 텍스타일’이라는 이름이 붙는 섬유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단다.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는 3시간만 자도 끄떡없는, 아직 50대 초반의 강철체력을 소유한 초긍정주의자 여장부이니 말이다.

My Leadership
정현분 대표

확대보기정적인 습관을 가져라
모든 일에 포지티브한 습관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야 정말 지금보다 더 나은 일이 생긴다. 살아보니 ‘하면 된다’가 ‘해도 안 된다’보다 훨씬 낫더라. 혈연, 지연, 학연 없이 이 자리까지 왔다. 보수적인 대구지역에서 여자로서 이 자리까지 오를 때 긍정적인 사고와 습관이 큰 도움이 됐다.

매사에 투명하라
투명하지 않으면 직원들이 따라오지 않는다. 회사 회계가 불투명한데 사장은 좋은 차 타고 좋은 옷 입으면, 직원들은 CEO를 믿지 못한다. 일례로 최고급 사양의 고가의 외제 차를 구입했을 때, 직원들 누구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았다. 직원들부터 좋은 차로 바꿔주고 빚을 다 갚고 세무서에 당당하게 세무 신고하러 타고 갈 만큼, 매사에 투명하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세대와 함께 가라
1년 넘게 고민하다 30억 원이 넘는 직기를 계약했다. 본래 오래 고민하는 성격은 아닌데, 이번엔 심사숙고했다. 그러다 회사도 글로벌 인재를 등용해 신진세대로 교체 중인데,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10년을 내다보며 제2의 정현분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박은주 전문기자 사진 박명래 객원사진기자

조회수 : 2,776기사작성일 : 201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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