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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바꾼다고 구글 되는 건 아니지만
호칭 파괴와 수평적 기업문화

직장 내에서 호칭을 트는 사례가 이곳저곳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방법은 다양하다. 간단히 이름에 ‘님’을 붙이기도 하고, ‘프로’나 ‘매니저’로 통일하기도 한다. ‘김 부장님’ 대신 ‘김 프로’라 부른다고 해서 기업문화가 바뀌겠냐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지만, 한 공동체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하나의 세계관이 숨어 있다. 호칭은 소통의 시작이므로 호칭을 바꾸는 것은 기업문화를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호칭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정신’을 바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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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장 떼는 기업들

확실히 기업 내에서 사용하는 호칭이 달라지긴 했다. 20세기에 ‘프로’나 ‘리더’라는 이름으로 기업 담당자와 소통해본 기억은 없다. 2000년대 들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 바뀐거라면 ‘팀장’이나 ‘책임’이 등장한 정도일까. 이때부터 직급이 아닌 직무 중심의 호칭을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그러다 2010년을 전후로 본격적인 호칭 파괴 움직임이 감지됐다. ‘매니저’까지는 위화감이 없었는데 ‘프로’나 ‘리더’라는 호칭을 처음 듣고 되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호칭 파괴는 글로벌 기업의 한국 지사나 실리콘밸리의 수평적 기업문화를 모방한 스타트업에서 시작됐다. 몇몇 스타트업의 CEO는 사내에서 직원들이 자신을 닉네임으로 부르는 것을 수평적 기업문화를 선도하는 증거로 자랑스럽게 내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이런 흐름이 전방위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이미 2017년부터 직급 대신 ‘프로’로 호칭을 통일한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인사제도 혁신안을 발표하고 직급과 연공서열 중심의 인사제도를 능력과 성과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CJ그룹도 6개로 나뉘었던 임원의 직급을 ‘경영리더’로 심플하게 통합했다. BC카드는 지난해 3월 창립기념일을 기점으로 전 직원이 영어 이름과 닉네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최원석 대표이사는 솔선수범해 자신을 ‘원스틴’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러달라고 밝히기도 했다. SSG닷컴과 이마트도 지난해 9월부터 모든 임직원을 부를 때 이름에 ‘님’을 붙이는 것으로 통일했다.
이런 흐름은 보수적인 업계로 통했던 금융업계, 건설업계, 중후장대 산업 등에도 파급되며 ‘호칭 파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급기야 제주관광공사는 지난 3월부터 지방공기업 최초로 관료적인 조직 체계에서 탈피해 직원 간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하는 수평적 호칭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수평적 기업문화로 인재 모시기

독일의 언어학자 레오 바이스게르버는 “한 언어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쓰는 모국어의 내적 형식에 따라 그들의 체험을 소화하고, 사유하고 행동하게 된다”고 했다. ‘호칭만 바꾼다고 기업문화가 수평적으로 바뀔 리 없다’고 일축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관계에서 누가 연장자인지를 기어이 가려야 하는 한국의 문화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한국인은 만나자마자 나이를 물어보는 국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가 연장자인지를 가려 말을 높일지 놓을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이를 묻는 것이 너무 직접적이라고 생각될 경우 학번이나 졸업연도로 우회해서 어떻게든 알아내고야 만다. 그래서 한국어에는 호칭에 따라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는 서열 의식이 숨어 있다. ‘중기님’, ‘중기씨’, ‘중기’는 모두 한 명을 지칭하는 이름이지만 미묘하게 위아래가 있다.
호칭 파괴는 나이, 경력을 중심으로 한 연공서열식 기업문화를 수평적인 문화로 바꾸려는 인사 체계의 변화이다. 기업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한 MZ세대는 세월만 가면 승진이 보상되는 인사제도, 단지 몇 달 먼저 입사했다는 이유로 연봉을 더 받는 호봉제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공정’에 민감한 이들은 구글, 애플 등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기업문화, 그리고 능력과 성과에 따라 평가받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인사제도를 선망한다.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 기업 네오플이 2022년 직원 공개 채용을 위해 공개한 유튜브 동영상에는 직원들이 호칭 파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오버킬개발실 장인영 기획자는 “어떤 직급이든 상관없이 서로가 ‘님’을 붙여 수평적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다”며, “그 덕분에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받으며 성장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모바일 던전앤파이터개발실의 소준 프로그래머 역시 “커뮤니케이션이 굉장히 자유롭고, 서로 존중하고 포용하는 분위기여서 업무적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눔으로써 빠르게 업무 역량이 성장할 수 있다”며 사내 업무 환경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기업 경영자에게 고민거리를 안겨줬다. 전문성을 가진 인재가 창의성을 발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영자들은 호칭 파괴, 더 나아가 직급 파괴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구글이나 애플처럼 모두가 평등한 관계에서 격의 없는 소통과 토론이 일어나지 않으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끌어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전 직원이 이름에 ‘님’을 붙여 서로를 부르고 있는 물류대행 서비스 스타트업 콜로세움코퍼레이션 박진수 대표는 “서로의 일과 의견,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기본 매너이자 원활한 협업의 전제라고 생각한다”며 “물류는 다양한 협업 주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사내 소통뿐 아니라 외부 고객이나 파트너와의 협업에도 호칭 파괴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호칭 파괴는 창의적인 소통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몇몇 중소기업 임직원의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우수 인재 확보를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최근 회사 직급 체제를 팀장과 팀원으로 간소화한 중소기업의 한 임원은 “요즘 직원들은 공정하지 않거나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면 바로 회사를 그만둔다”며 “능력 있는 직원을 붙잡아두기 위해 연공서열에 따른 수직 관계를 과감하게 버리고 능력에 맞게 평가받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개선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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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와 실효성 놓고 엇갈린 반응

호칭을 바꾸는 것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중기님, 토 달지 말고 제가 하라는 대로 하시죠.” 아무리 ‘님’ 자를 붙여도 창의적인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조직의 의사결정 시스템과 그에 대한 평가 및 보상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호칭 파괴도 무용지물일 뿐이다.
실제로 호칭 파괴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직급이 단순해지거나 없어지면 승진과 그로 인한 연봉 상승 기회가 없어져 동기부여가 약해지고,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일각에서는 호칭과 직급 파괴는 승진 억제를 통해 임금 상승을 억제하고 조직을 슬림화해 인건비를 줄이려는 꼼수라는 해석도 내놓았다. 조직문화 개선 의지, 이를 구현하기 위한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호칭 파괴를 도입한 기업이 모두 원하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아니다.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2018년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호칭 파괴 제도를 도입한 기업은 전체 조사 대상 기업의 11.6%에 불과했고, 이 가운데 25%는 제도의 실효성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대표적인 예로 KT는 호칭 파괴를 실시했다가 5년 만에 다시 기존 체제로 회귀한 경우다. 2009년부터 직급 대신 ‘매니저’라는 호칭을 도입했던 KT는 2017년 2월에 우리말 호칭으로 다시 회귀했다. 호칭 변경만으로 수직적인 문화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외부 고객사와 업무하는 과정에서 혼선이 발생한 것이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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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존중과 합의

호칭 파괴의 목적은 분명하다. 평등한 소통이다.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통해 조직의 의사결정 효율을 높이고 직원들의 창의력을 이끌어내자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하는 대단히 뛰어난 방법이나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호칭 파괴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존중과 합의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칭 파괴를 넘어 회사에서 평어 사용의 가능성을 탐색한 문예지 《릿터(Littor)》 편집부의 실험은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격월간 문예지 《릿터》를 제작하는 민음사 문학팀은 3개월간 평어 사용을 도입했다. 호칭은 ‘님’ 자를 빼고 이름만 부르는 것으로 통일했고,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상급자에게 “혜진! 내 기획안 괜찮았어?”라고 말해야 하는 식이다. 3개월간의 실험 결과는 직원 5명의 후기 형태로 지난 2/3월호에 게재됐다.
6년 차 정기현 대리는 “평어를 쓰면서 우리는 자신과 서로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회의 자리에서 털어놓기 쉽지 않은 종류의 감정도 쉽게 나누었고 그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보다 가뿐한 마음으로 머리를 맞댔다”며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소감을 전했다.
이쯤 되니 가장 연차가 높은 상급자의 소감이 궁금해진다. 11년 차 박혜진 차장은 “어색함 때문에 평어울렁증을 호소하며 하차 벨을 제일 먼저 눌렀었다”고 고백하면서도 “세 달 동안 다른 팀과 구분되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쓰며 기존 언어에서 발견하지 못한 서로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고무됐다”고 전했다. 그는 또 “팀원들과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가까워지고 싶지 않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며, 평어 사용을 계기로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호칭을 아무리 바꿔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많다. 호칭을 바꾸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야 한다. 쓰지 않을 표현을 함께 정하고, 모두를 위한 회의 규칙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조직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서로 공감하고, 정교하고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

임숙경

조회수 : 303기사작성일 : 2022-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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