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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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舊)도심? 청년에겐 신(新)상권!
구도심에 활기 불어넣는 청년장사꾼들

 

‘위대한 왕국이 퇴색해가는 것은 후진 공화국이 붕괴되는 것보다 훨씬 더 서글프다.’ 한물간 구도심을 만날 때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잊혀진 왕국」이 떠오르곤 한다. 그런데 최근 서글픈 구도심에도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청년창업의 꽃이 핀 것이다.

지금 원효로1가에 가면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 ‘백범로87길’은 지난 10년 동안 시간이 멈춰버린 골목이었다. 물론 이 거리도 소위 ‘잘나가던’ 시절은 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인쇄소 골목’이라고 불리며 쉴 새 없이 기계음이 쏟아지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쇄업이 쇠락하면서 골목도 함께 쇠퇴했다. 2008년 민간 개발사업까지 불발되면서 골목은 더 초라해졌다. 주변에는 20~30층 높이의 거대 주상복합이 하루가 멀다하고 들어섰지만, 백범로87길은 그럴수록 더욱 낮고 스산한 거리로 변해갔다. 그 즈음이었다. 청년장사꾼 김연석 공동대표(34세)는 출근길에 운명처럼 이 거리를 발견했다.
“권리금과 보증금, 그리고 월세가 적은 상권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원효로1가는 주변에 머금고 있는 유동인구가 꽤 많았지만 적당한 상권이 없었기에, 잘만 하면 가능성이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청년장사꾼은 2012년 5명의 친구들이 모여서 ‘열정감자’, ‘열정꼬치’, ‘우사단길 계단장’ 등을 잇달아 성공시킨 소자본 창업단체로, 현재는 30명이 넘는 직원과 11개의 음식점을 운영하는 매출 30억 원의 명실상부한 청년창업 신화의 주인공이다. 이들이 백범로87길에 등장하자 거리에는 비로소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2014년 11월 25일 ‘치킨사우나(찜닭)’, ‘감자집(감자튀김)’, ‘열정도 고깃집(삼겹살)’, ‘판(백반)’, ‘철인28호(철판구이)’, ‘아지트(술집)’ 등 6개의 개성만점 가게가 동시에 오픈했다. 워낙 죽어 있던 상권이다 보니 가게 하나만 오픈해서는 거리를 살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7개월가량의 시간이 흐른 지금, 백범로87길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 원효로1가 백범로87길은 더 이상 죽은 상권이 아니다. 거대 주상복합에 둘러싸인 채 소외된 섬 형태였던 이곳은 현재 거리 곳곳에 구도심과 젊은 감각이 재미있게 조화를 이루는 감각적인 가게들이 속속 들어차 있다. 청년장사꾼은 이 길을 ‘열정도(熱情島)’라고 명명했으며, 청년장사꾼 이외에도 ‘일공오 삼겹살’이나 ‘커피집’, ‘커피더맨’ 등의 재기발랄한 젊은 가게들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주변도 달라졌다. 백범로87길과 나란히 뻗어 있는 백범로90라길에도 ‘붐박스’라는 이름의 뮤직펍과 ‘술에꼬치다’라는 독특한 선술집이 생겼고, 백범로87길과 90길을 잇는 작은 골목에는 ‘Alley43’이라는 아기자기한 옷가게와 이태원, 삼청동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식주점 ‘모던식당’(오픈 예정)도 눈에 띈다. 백범로87길 끝에서 6호선 효창공원앞역으로 우회전하는 원효로80길에 위치한 꽃집 ‘아티크’는 기와지붕 아래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기도 하다.
“평일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손님이 가장 많고, 대부분의 가게들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백범로87길 내에서 청년장사꾼이 운영하는 6개의 매장을 총괄 관리하고 있는 구현도 점장(29세)은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옛 인쇄소 골목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취재 당일이 평일 저녁이었고, 메르스 감염의 공포가 판을 치는 중이었음에도 열정도 내에는 손님이 북적거리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분위기가 살아 있었다.

‘열정도’는 신상권이 될 수 있을까?
통계청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12년까지 10년간 자영업 폐업건수는 793만 8,683건에 달한다고 한다. 해마다 약 80만 명 정도가 폐업을 경험하는 셈이다. 청년들이 구도심에서 기회를 찾은 것은 기쁜 일이지만 과연 이들의 열정이 지속적으로 세상과 통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앞서기도 한다.
“친구들을 따라 열정도에 둥지를 틀었다”는 ‘커피집’ 대표 남지우(32세) 씨는 청년장사꾼 멤버들과의 오랜 인연으로 ‘감자집’ 맞은편에서 도쿄의 유명 블렌딩 하우스인 ‘카페 바하’의 로스팅 원두로 개성 있는 핸드드립 커피를 선보이고 있다. 원래 사진작가인 그로서는 카페 운영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도 전혀 걱정이 없다는 얼굴이다.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에 열리는 ‘열정도 주민회의’에서 정보도 공유하고 도움도 받곤 한다는 그는, 혼자였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많은 일들을 열정도에 새롭게 합류한 청년창업자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이루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매달 2회씩 개최하는 플리마켓 겸 야시장인 ‘열정도 공장’이 성공적으로 흥행하면서 열정도를 찾는 손님이 많이 늘었는데, 이는 열정도에 둥지를 튼 청년창업자들이 똘똘 뭉쳐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열정도 내 가게들이 서로 조화롭게 라인업을 형성하고 있는 점도 좋다. 일례로 열정도 초입에 위치한 치킨 전문점 치킨사우나나 열정도 고깃집, 열정도 쭈구미 등에서 식사 겸 1차를 즐기고 근처 커피집이나 커피더맨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감자집, 붐박스, 술에꼬치다 등에서 흥겨운 2차를 보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정도다. 청년장사꾼이 운영하는 6개의 매장은 메뉴를 테이크아웃해서 다른 매장에서 즐기는 것도 가능한데, 열정도 내에서 감자집의 감자튀김을 포장해서 먹는 사람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열정도에 위치한 가게들이 저마다의 뚜렷한 개성을 자랑한다는 점 역시 이 거리를 흥행시키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커피집 지하에서 위스키 바 ‘백룸’을 운영하는 김기정 대표(30세)는 폐쇄된 증류소의 위스키를 구매해서 판매하는 이색 콘셉트의 술집을 열고, 자기가 좋아하는 술만파는 독특한 영업 방식을 고수하고 있음에도 단골손님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열정도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보기만 해도 바로 들어가보고 싶은 비주얼을 자랑하는 꽃집 아티크도 이색적인 외관으로 벌써부터 입소문을 타고 있다. 청년 또는 젊은 아티스트들의 세련된 감각이 구도심의 앤티크한 분위기와 적절하게 어우러지다보니 일부러 거리를 구경하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아직 오픈도 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LP판을 멋스럽게 장식한 ‘모던식당’은 식당 입구 디자인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강탈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현재까지의 열정도 매출 성적표는 우수한 편이다. 물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픈 후 3~4개월간 적자를 면치 못했던 김연석 대표는 “회의가 든 순간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때마다 청년의 열정과 아이디어로 어려움을 하나씩 해결했다”고 밝혔다. 열정도 내의 가게를 한 곳이라도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싹싹하고 위트 있는 열정도 청년 종업원들과 이색적인 거리 디자인, 가게 인테리어, 메뉴판 문구 하나에서까지 특별한 재미와 감동을 찾을 수 있다. 하나같이 ‘젊은 사람들이 장사 좀 할 줄 아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도록 꾸며놓았기 때문이다.

열정, 그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
도시는 언제나 변화무쌍하다. 덕분에 시내 슬럼가나 노후한 주택·상가 문제가 없는 도시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이런 공간들을 기회의 땅으로 보고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일고 있다. 서울숲 근처 성수1가도 이런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최근 2~3년 사이에 다시 살아난 구도심 중 하나이다. 원래 낙후된 공장지역이던 성수1가에 젊은 디자이너들과 소셜벤처들이 입점하면서 ‘핫’하고 ‘힙’한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하지만 영광에는 상처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성수1가를 화려하게 변화시킨 초창기 멤버인 디자인협동조합 ‘보부상회’가 지난 5월 20일 더 이상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성수동을 뜨면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문제가 불거졌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낙후된 구도심이 젊은 아티스트들의 힘으로 활기를 되찾으면 임대료가 올라버려 원주민들과 아티스트들이 다시 내몰리는 현상을 뜻하는데, 이미 가로수길, 삼청동, 경리단길, 문래동 등의 지역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청년들은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공간을 찾다보니 구도심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청년들의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일구어놓은 신상권이 건물주의 주머니만 살찌우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문래동에서는 5~10년 걸려서 피부로 느껴지던 것이 성수동은 2~3년 만에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생겼대요. 그런데 저희는 불과 6개월이 지났는데 당장 내년에 쫓겨날까봐 걱정하고 있어요. 바로 어제까지 장사하던 가게가 오늘 문을 닫는 상황이어서 불안합니다.”
백범로90라길에 자리 잡은 창작 커뮤니티 ‘감자꽃 스튜디오’의 김설하 연구팀장(35세)은 임대 계약이 만료되는 내년초가 벌써부터 두렵다고 한다. 자신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서울 시내에서 이렇게 좋은 공간을 다시는 구할 수 없을 거라는 아쉬움과, 쓰레기더미로 뒤덮여 있던 버려진 건물을 직접 치우고 꾸민 손때 묻은 공간을 누군가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동시에 느껴진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열정도 전역에 퍼져 있어서 많은 청년창업자들이 장사가 잘돼서 기쁘다가도 동시에 임대료가 오르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노심초사 잠을 못 이루는 아이러니를 겪고 있기도 하다.
대구대학교 부동산학과 이상화 교수는 “2000년대의 젠트리피케이션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며 구도심의 상업화가 날로 빨라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구도심에서 가능성을 찾고 터전을 일구는 방식조차 이미 많이 개발 돼버렸고, 결국 젊은 아티스트나 창업자들이 감각적으로 구도심을 되살렸다가 갑자기 올라버린 비싼 임대료에 쫓겨나는 과정도 하나의 수순처럼 자리매김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를 개인의 힘으로 막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렇다면 구도심을 새로운 상권으로 변화시키는 청년들의 창업 열정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들이붓는 것처럼 허무한 결과만을 낳을까?
이럴 때는 커트 코베인의 “열정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Rather be dead than cool)”는 뻔한 말로 답을 대신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작은 도전이라도 도전은 아름답고, 어디에 핀들 꽃은 꽃일 수밖에 없다. 청년들은 빼앗기고 내쫓겨도 계속 창업하며 자기만의 무언가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또 가만히 앉아서 호락호락 당하지 않도록 머리를 쓰는 방법도 찾아내야 한다.
청년장사꾼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염두에라도 둔 듯, 5년 계약으로 열정도에 자리를 잡았다. 또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준비한 이도 있다. 커피집은 이동이 가능한 트레일러 형태로, 언제 무슨 일이 생기든 바로 떠날 수 있는 그야말로 노마드형 카페이다. “세상사가 하도 불안하고 임대료 문제로 쫓기는 것도 귀찮아서 아예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카페를 기획하게 됐다”는 남 대표의 이야기에 미소가 절로 난다. 구도심이 신상권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멋지지만, 어디서든 살아가는 꿋꿋한 젊음의 열정이 더 아름답다.
원효로1가의 이야기가 신화가 될지, 뻔하고 슬픈 이야기가 될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 그곳에 가면 즐겁고 재미있고 뜨거운 열정이 살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젊음과 열정은 조금 나이가 든 우리들까지도 다시 뜨겁게 하고 있다. 지치고 피로한 오늘, 열정도를 찾으면 작은 위로와 젊은 열정을 반드시 얻어올 수 있다.

박성연 객원기자 사진 김윤해 객원사진기자​

 

 

조회수 : 1,980기사작성일 : 2015-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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